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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판 '기생충' 매진, 뮤지컬 '빈센조'도 꽉찼다…K콘텐트 돌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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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이영희 도쿄특파원

이영희 도쿄특파원

"나의 목표는 이 빌딩을 부수는 것이다."
서울 시내에 있는 허름한 빌딩 '금가프라자'를 배경으로 빈센조 역할의 배우 와다 마사나리(和田雅成)가 첫 대사를 내뱉었다. 지난 11일 일본 효고(兵庫)현 고베(神戸)에 있는 'AiiA 씨어터 고베'에선 한국 드라마를 뮤지컬로 각색한 '빈센조'가 막을 올렸다. '빈센조'는 2021년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에 방영되며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끈 드라마다. 일본 연예기획사인 에이벡스는 드라마 제작사인 한국 스튜디오드래곤과 손을 잡고 일본 연출가와 배우를 기용해 세계 최초로 '빈센조'의 뮤지컬화에 도전했다.

지난 11일 일본 효고현 'AiiA 씨어터 고베'에서 한국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빈센조'가 공연되고 있다. 사진 에이벡스

지난 11일 일본 효고현 'AiiA 씨어터 고베'에서 한국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 '빈센조'가 공연되고 있다. 사진 에이벡스

일본 배우들이 일본어로 연기하지만 뮤지컬의 배경은 한국이고, 등장인물 이름도 원작 그대로다. 20화가 넘는 드라마를 3시간 반 짜리 뮤지컬로 만들어내면서 이야기의 속도감을 높였다. 에이벡스가 제작한 노래 27곡이 리듬감을 더했다. 총 775석의 극장은 2~3층 일부를 제외하고는 꽉 들어찼다.

요코하마(横浜)에서 공연을 보러 왔다는 가나자와 고나츠(金澤小夏·31)는 "배우 와다씨의 팬이라 원작 드라마도 뒤늦게 봤다"며 "엄청나게 재밌어서 이후 다른 한국 드라마에도 관심이 생겼다"고 말했다. 뮤지컬 '빈센조'는 고베에서 5회 공연을 마친 후 18일부터 도쿄(東京)에서, 25일부터 오사카(大阪)에서 공연을 이어간다.

'기생충' 연극도 전석 매진

'빈센조'의 뮤지컬화는 한국 콘텐트의 IP(지식 재산권)가 최근 일본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확장하는 대표적 사례다. 그동안 한국 드라마·영화가 일본 제작진과 배우에 의해 드라마나 영화로 리메이크되는 경우는 무수히 많았다. 올해 들어 그 열풍은 연극·뮤지컬 무대로 이어지고 있다. 일본 매체 닛케이트렌드는 지난달 '빈센조'의 일본 뮤지컬화를 전하면서 "에이벡스가 회사의 강점 중 하나인 무대 제작을 한국 드라마 IP까지 확장해 새로운 시장 개척에 나섰다"고 전했다.

 일본에서 연극으로 만들어진 '기생충' 포스터. 사진 CJ E&M

일본에서 연극으로 만들어진 '기생충' 포스터. 사진 CJ E&M

지난 6월에는 봉준호 감독의 글로벌 히트작 '기생충'이 일본에서 연극으로 제작됐다. 재일동포 연극·영화 연출자인 정의신 감독이 연출하고 일본 연극계의 톱스타인 후루타 아라타(古田新太)가 송강호가 연기한 아버지 역할을 맡아 공연 전부터 큰 화제를 모았다. 작품 배경은 일본 간사이(関西) 지역으로, 홍수라는 설정을 지진으로 바꿔 일본 관객들의 공감을 끌어냈다. 한달여 진행된 공연이 모두 전석 매진되며 호평을 받았다.

일본 연극·뮤지컬계가 한국 드라마와 영화의 IP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한국의 문화콘텐트가 그만큼 높은 작품성과 인지도를 갖게 되었다는 의미다. 한류콘텐트 전문가인 일본 조사이국제대학 비즈니스디자인연구과 황선혜 교수는 "2000년대부터 '겨울연가' 등 한국 드라마가 일본에서 뮤지컬로 소개된 적이 있지만, 주로 한류 팬들을 대상으로 한 기획성인 경우가 많았다"면서 "이제는 한국 드라마나 영화를 일본 현지화해 소개해도 일반 공연 팬들을 불러 모을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뮤지컬 제작사들, 韓 웹툰에도 관심 

특히 일본 뮤지컬의 경우 한국의 1.5배가 넘는 큰 시장을 갖고 있지만 한국과는 달리 오리지널 창작 뮤지컬이 부족해 대부분이 라이선스 뮤지컬로 채워진다. 그만큼 IP 확보를 위한 경쟁이 치열하고 한국 콘텐트가 파고들 여지도 많다는 이야기다. 공연 관련 조사업체인 피아총연에 따르면 일본의 연극·뮤지컬·음악 무대 등을 모두 포함한 라이브 엔터테인먼트 시장은 2020년 코로나19의 영향으로 1106억엔(약 1조163억원)까지 줄어들었으나 올해는 코로나19 이전을 넘어서는 6330억엔(5조 8167억원)까지 회복될 것으로 예상된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시장이 급격히 커지면서 여러 장르의 한국 콘텐트가 일본판 뮤지컬로 제작돼 무대에 오르고 있다. 가장 활발한 것은 한국 창작 뮤지컬 라이선스를 수입해 일본판으로 제작하는 형식이다. 올해 상반기 '마리 퀴리', '다윈 영의 악의 기원' 등의 한국 창작 뮤지컬이 일본에서 공연됐고,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다카라즈카 가극단도 7월 한국 창작 뮤지컬인 '엑스칼리버'를 공연했다. 뮤지컬 '베토벤'도 영화·공연제작사 도호에 수출됐다.

최근 일본에서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게임을 뮤지컬로 만든 일명 '2.5차원 뮤지컬' 붐이 일고 있다. '테니스의 왕자' '세일러문' '나루토' '하이큐' 등 인기 만화들이 뮤지컬로 만들어져 대성공을 거뒀다. 업계에서는 탄탄한 스토리를 갖춘 한국의 인기 웹툰을 뮤지컬로 제작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황 교수는 "장르를 넘나드는 IP 수출, 국경을 넘는 이야기의 확장은 앞으로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日 흥행비자 완화, 공연에도 영향 

8월부터 일본 정부가 외국인 공연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흥행(興行) 비자'의 발급 요건을 완화하면서 한국 연극이나 뮤지컬의 일본 진출도 더욱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흥행 비자'는 가수나 배우 등 예술 활동을 위해 입국하는 이들에게 발급하는 비자로 그동안엔 체류 기간이 '15일 이내'에 객석 규모 100석 이상 공연에만 발급해주는 등 조건이 까다로웠다.

11일부터 일본에서 공연을 시작한 뮤지컬 '빈센조' 포스터. 사진 에이벡스

11일부터 일본에서 공연을 시작한 뮤지컬 '빈센조' 포스터. 사진 에이벡스

하지만 이달부터는 체류 기간이 보름에서 한 달로 늘어났고 객석수도 서서 볼 수 있는 공간까지 포함하는 방향으로 바뀐다. 이영훈 한국콘텐츠진흥원 도쿄센터장은 "소규모 연극·뮤지컬 공연이나 장기 공연도 가능해져 더 많은 한국 무대 예술이 일본에 소개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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