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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크림반도 봉쇄 위기 처한 러, 북극항로에 사활 걸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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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2호 11면

대양 진출 난관 부닥친 러시아

러시아와 중국이 지난달 21일 동해상에서 양국의 군함 10여 척과 항공기 30여 대를 동원해 연합 해상훈련을 벌이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러시아와 중국이 지난달 21일 동해상에서 양국의 군함 10여 척과 항공기 30여 대를 동원해 연합 해상훈련을 벌이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동아시아와 유럽을 최단 거리로 연결하는 북극항로를 둘러싸고 러시아·중국과 미국 등 서방의 주도권 경쟁이 본격화하고 있다. 이달 초엔 서태평양 지역을 함께 순찰하던 러·중 군함 11척이 미국 알래스카의 알류샨 열도에 접근하면서 군사적 긴장도 고조되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러시아와 중국은 지난달 20~23일 동해에서 군함 10여 척과 항공기 30여 대를 동원해 연합 해상훈련을 벌인 데 이어 서태평양을 지나 지난주엔 알래스카 인근 공해상까지 진출했다. 이에 미국도 구축함 네 척과 대잠초계기 등을 급파하며 맞섰다.

러시아 입장에서 북극항로의 주도권 확보는 국가의 사활을 걸 정도로 중대한 전략 사안이다. 글로벌 패권을 유지·강화하기 위해서는 대양을 장악할 수 있는 강한 해군력이 필수다. 러시아가 18세기 이후 부동항과 대양으로의 출구를 확보하는 데 국가적 역량을 총동원해온 이유다. 하지만 지난해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서방의 잇단 제재와 반격 속에 이 같은 러시아의 오랜 국가 목표가 난관에 봉착한 상황이다.

당장 발트해와 크림반도를 통해 대양으로 나아가는 길이 막히기 시작했다. 특히 러시아와 발트해를 공유해온 핀란드가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전격 가입하고 스웨덴도 가입이 확실시되면서 러시아 해군이 곤경에 처하게 됐다. 발트해 대부분이 사실상 나토 관할 영역이 되면서 제해권을 상실할 위기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러시아 역외영토로 러시아 해군의 핵심인 발트함대 사령부가 위치한 칼리닌그라드도 고립될 처지에 놓였다.

푸틴

푸틴

러시아 흑해함대의 본거지인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 군항도 위기 상황이긴 마찬가지다. 천혜의 부동항인 이곳은 1년 내내 지중해를 통해 대서양으로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다. 하지만 최근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 남부를 잇는 다리가 우크라이나의 미사일 공격으로 잇따라 파손되면서 러시아군의 보급로가 끊길 위험이 커진 것은 물론 부동항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게 됐다.

이처럼 러시아 해양 패권 전략의 핵심 지역으로 꼽히던 발트해와 크림반도가 사실상 봉쇄될 위기에 처하자 눈을 북쪽으로 돌려 북극해와 북극항로를 새로운 돌파구로 삼으려 한다는 게 국제사회의 분석이다. 이를 위해 러시아가 중국과의 전략적 협력과 연대를 강화하고 나서면서 미국·유럽 등 서방과의 갈등이 한층 심화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실제로 러시아는 2021년부터 서태평양 지역에서 중국과의 연합훈련을 강화해 왔다. 지구온난화로 북극 지방의 해빙이 크게 줄면서 북극항로 개설과 자원 개발 가능성이 커진 것도 러시아가 북극에 관심을 쏟게 된 또 다른 배경으로 꼽힌다. 이에 러시아는 북극해의 상당 부분을 배타적 경제수역(EEZ)으로 선포하고 북극해 연안의 시베리아 지역에 군대도 집중 배치하고 나섰다.

전체 면적이 1650만㎢에 달하는 북극권의 해빙은 겨울에 늘었다 여름에 줄기를 반복하는데 지구온난화 등의 여파로 여름철 감소 속도가 해가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미국 국립설빙데이터센터(NSIDC)에 따르면 지난달에만 하루 9만3300㎢의 속도로 줄었다. 1981~2010년 30년 동안의 하루 평균 감소 면적인 8만6900㎢보다 7.4% 넓은 규모다. 지난달 위성으로 측정한 북극권 전체 해빙 면적도 818만㎢로 조사를 시작한 1979년 이래 세 번째로 작았다.

이렇게 해빙이 급속히 줄면서 생긴 북극항로는 한국과 일본·중국·대만 등 동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최단 뱃길이란 점에서 더욱 주목을 모으고 있다. 수에즈 운하를 지나는 기존 항로에 비해서도 거리가 9000㎞ 이상 짧다. 물류비용을 그만큼 줄일 수 있는 만큼 한국 등 수출을 많이 하는 국가에 유리한 항로다.

북극권을 통과하는 항로는 크게 북동항로(NEP), 북서항로(NWP), 북극 통과 항로 등 세 가지로 나뉜다. 한국에서 동해를 지나 일본 홋카이도와 러시아 사할린 사이 해협을 거쳐 북극해 입구 베링해협까지는 모든 항로가 공통이다. 이후 북동항로는 베링해협에서 서진해 러시아 시베리아 연안 북극해와 노르웨이 북쪽을 지나 서유럽까지 이어진다. 반면 북서항로는 베링해협에서 동진해 캐나다 북쪽 북극해를 지나 미국 동부의 대서양으로 향한다.

문제는 북동항로와 북서항로 모두 크고 작은 섬과 얕고 좁은 해협이 산재해 있어 안전이 늘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북동항로는 최저 수심 6.7m에 폭 60㎞인 드미트리랍테프 해협 등을 지나야 하고 북서항로도 캐나다 북부에서 최저 수심 13.3m에 길이 161㎞, 폭 32~64㎞의 좁고 얕은 해협을 통과해야 한다. 이에 비해 북극을 곧장 통과하는 항로는 좁은 해협을 지날 필요 없이 북극의 넓은 바다로 항해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여름철 북극 해빙에 러시아와 서방국가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다.

북극해를 향한 러시아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이 같은 관심과 집착은 앞으로 더욱 강해질 것이란 게 국제사회의 공통된 관측이다. 러시아의 지정학적·군사적·경제적 이익이 모두 걸려 있는 ‘전략적 탈출구’라는 점에서다. 이에 따라 러시아군이 한반도 인근의 동해와 서태평양 지역에 출몰하는 횟수도 훨씬 잦아질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tzschaeit@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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