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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 절절한 그림편지, 그의 일본인 아내가 궁금해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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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서귀포 앞바다를 바라보는 야마모토 마사코. 다큐멘터리 영화 ‘이중섭의 아내’ 속 한 장면. [사진 혜화1117]

서귀포 앞바다를 바라보는 야마모토 마사코. 다큐멘터리 영화 ‘이중섭의 아내’ 속 한 장면. [사진 혜화1117]

1939년 도쿄의 미술학교에서 처음 만난 화가 이중섭과 마사코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5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결혼한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1950년 겨울 해군 수송함을 타고 부산으로 피난 갔고 한 달 만에 제주로 내려갔다. 생활고에 아내와 두 아들을 1952년 도쿄로 떠나 보낸 것이 사실상 영이별이었다. 절절한 그림편지로 가족에게 마음을 전하던 이중섭은 4년 뒤 무연고자로 39년의 생을 마쳤다.

생활력 없는 남편, 어린 두 아들의 부양은 아내 마사코의 몫이었다. 목사 가운을 재단해 팔며 생활을 이어갔다. 서귀포에서의 배고픔으로 아버지를 기억하는 장남 태현씨는 2016년 인두암으로 먼저 세상을 떴다. 둘째 태성씨는 아버지가 유명한 한국인 화가였다는 사실도 모른 채 자랐다.

이중섭과 마사코의 결혼식. [사진 혜화1117]

이중섭과 마사코의 결혼식. [사진 혜화1117]

한국의 대표 화가 이중섭, 그러나 일본에 남은 그의 가족 이야기는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최근 『이중섭, 그 사람』(혜화1117)을 출간한 오누키 도모코(48) 마이니치신문 전 서울특파원을 8일 서울 상암동에서 만났다.

2016년 서울에서 열린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전에서 본 이중섭의 편지화 속 어색한 일본어에 마음이 끌린 것이 집필로 이어졌다. “모국어가 아닌 일본어로는 전부 전할 수 없는 아쉬운 마음을 강렬한 필치의 그림으로 대신한 걸까요. 한국어의 어려움을 매일 체감하는 서울 특파원인 제 모습 같았어요.”

그는 이중섭의 자취를 쫓아 서울·도쿄·제주·통영·부산 등의 현장을 취재했고, 아내와 아들을 인터뷰했다. 그 결과물로 일본 대형 출판사 쇼가쿠칸에서 주최하는 논픽션 대상을 받았고, 2021년 일본 최초의 이중섭 평전으로 출간됐다.

1954년 11월 이중섭이 보낸 편지화. [사진 혜화1117]

1954년 11월 이중섭이 보낸 편지화. [사진 혜화1117]

“그때를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제 세상에 없어요. 마사코 선생을 세 차례 만났지만 힘들었던 시절은 과거가 되어 있었어요. 40대의 마사코 씨를 만나 이야기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김환기 화백의 부인 김향안 여사, 시인 김광균 등 지인들이 보내온 편지도 집필에 큰 도움이 됐다. 상당수가 한국에 공개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오누키 기자는 5년간 서울특파원으로 근무하면서 남편과 떨어져 초등생 아들을 홀로 키웠다.  34세에 남편을 잃고 초등생 두 아들을 홀로 키운 마사코의 젊은 시절이 자주 겹쳐졌다고 한다.

단 7년을 부부로 함께 지내고, 이후 70년 가까운 세월을 홀로 견디는 게 가능할까. 남편 이중섭은 어떤 의미일까. 오누키 기자는 “행복했던 것은 쭉 기억하고, 힘들었던 것은 누구도 탓하지 않은 채 그저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게 아닐까. 그게 마사코 선생이 101살까지 살아간 힘이었을 것”이라며 1953년 마사코가 이중섭에게 보낸 편지글을 보여줬다. ‘이렇게 사랑을 받는 저는 전 세계 누구보다 가장 행복합니다. 그 사랑만 있으면 아무것도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충분해요.’

오누키 도모코 마이니치신문 전 서울특파원.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오누키 도모코 마이니치신문 전 서울특파원.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겨울연가’ 같은 한류 드라마도 즐겨보던 마사코는 “누군가 이중섭을 연기한다면, 욘사마보다는 이병헌이면 좋겠다”며 웃기도 했다고 한다.

“남편의 넋이 나를 지켜주고 있구나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던 마사코는 지난해 8월 13일 남편의 곁으로 돌아갔다.

오누키 기자는 “마사코의 목소리로, 이중섭의 한결같은 사랑을 알리고 싶다”며 “둘의 사랑이 있었기에 이중섭의 작품도 나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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