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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로 7년, 70년은 홀로 버텼다…이중섭 향한 그녀의 연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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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한국판인 『이중섭, 그 사람』(왼쪽)과 일본판 『사랑을 그린 사람 』을 손에 든 저자 오누키 도모코 마이니치 신문 전 서울 특파원.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책의 한국판인 『이중섭, 그 사람』(왼쪽)과 일본판 『사랑을 그린 사람 』을 손에 든 저자 오누키 도모코 마이니치 신문 전 서울 특파원.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장면1
2016년 6월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전시장. 화가 이중섭(1916~56)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보러 사람들은 긴 줄을 이루었다. 오누키 도모코(大貫智子) 마이니치 신문 전 서울 특파원도 그중 하나였다. 미술관 가는 취미가 없는 그를 이곳으로 이끈 건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의 일본인 아내’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보고 싶다(見たい).” 도쿄에 있는 어린 두 아들을 그리워하며 이중섭이 보낸 그림 편지 속에서 ‘만나고 싶다(会いたい)’가 아닌 한국어로 생각한 다음 머릿속에서 일본어로 옮긴 듯한 표현이 눈에 띄었다. '모국어가 아닌 일본어로는 전부 전할 수 없는 아쉬운 마음을 강렬한 필치의 그림으로 대신한 걸까.' ‘보다’와 ‘만나다’ 사이의 미묘한 위화감에서 한국어의 어려움을 매일 체감하는 서울 특파원, 자신의 모습이 겹쳐졌다. 이중섭 부부의 이야기를 더 알고 싶어졌다.

이중섭 부부 이야기 책 낸 전 마이니치 신문 서울특파원

#장면2
“키도 크고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었죠.”
94세 할머니는 60년 전 세상을 떠난 남편 이야기를 하며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식민지ㆍ분단ㆍ전쟁을 겪으며 서른넷에 남편을 잃고 어린 두 아들을 혼자 키운, 힘든 세월마저 비껴간 듯한 만년 소녀. 2016년 9월 도쿄 시부야 인근의 자택에서 처음 만난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ㆍ1921∼2022) 여사의 모습이었다. 이중섭은 그에게 이남덕이라는 이름을 붙여줬다. 오누키(48) 기자는 '90세까지 산다면, 나도 이렇게 나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돌아봤다.

1954년 11월 이중섭이 보낸 편지화.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1954년 11월 이중섭이 보낸 편지화.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것은 ‘국민화가’ 이중섭을 둘러싼 신화도, 전설도 아니다. 그저 진득한 사랑 이야기다. 단 7년을 부부로 함께 지내고, 이후 70년 가까운 세월을 홀로 견딘 어느 아내의 이야기다. 8일 서울 상암동에서 만난 오누키 기자는 “어제 마사코 씨와의 첫 인터뷰 녹음본을 다시 들어봤는데, 이중섭과 처음 만난 18세 때의 별명대로 ‘아고리(턱이 긴 이 씨)’라고 부르며 웃는 목소리였다”고 말했다.
서울 특파원을 지낸 일본 신문사 기자가 한일 관계도 대북 문제도 아닌, 1956년 세상을 떠난 한국인 화가와 그의 남은 가족들에 대한 책을 썼다. 2021년 일본 최초의 이중섭 평전으로 출간된 『사랑을 그린 사람, 이중섭과 야마모토 마사코』다. 오누키 기자가 이중섭의 자취를 쫓아 서울·도쿄·제주·통영·부산 등 현장을 취재하고, 아내와 아들을 인터뷰한 결과물인 이 책은 일본 대형출판사 쇼가쿠칸에서 주최하는 논픽션 대상을 받았다.
일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중섭, 또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그의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 바다를 두고 서로 떨어져 있던 두 사람을 연결한 저작이다. 코로나19로 두 나라를 오갈 수 없던 시절, 더 큰 공감을 얻었다는 평가다. 책은 최근 『이중섭, 그 사람』(최재혁 역, 혜화1117)이라는 제목으로 국내에 번역 출간됐다.
“미술도, 이중섭도 잘 몰랐지만 그보다 더 어려웠던 것은 그때를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제는 세상에 없다는 거였어요. 부인 마사코 씨는 세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힘들었던 시절은 이미 과거가 되어 있었어요. 40대의 마사코 씨를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했습니다.”(오누키 기자)
책의 토대가 된 것은 이중섭과 마사코 뿐 아니라 김환기 화백의 부인 김향안 여사, 시인 김광균 등 지인들이 보내온 편지다. 상당수가 한국에 공개되지 않았던 것들이다. 탄핵 정국, 한일 관계 경색 등의 이슈로 특파원 재임 기간이 5년으로 늘었던 때의 취재 결과물이다. 남편과 떨어져 서울에서 초등생 아들을 키우며 워킹맘으로 산 기간이기도 했다. 34세에 남편을 잃고 초등생 두 아들을 홀로 키운 마사코의 젊은 시절이 자주 겹쳐졌다. “‘마사코 씨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1945년 5월 치러진 이중섭과 야마모토 마사코의 결혼식. [사진 혜화1117]

1945년 5월 치러진 이중섭과 야마모토 마사코의 결혼식. [사진 혜화1117]

1939년 도쿄의 미술학교에서 처음 만난 이중섭과 마사코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5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결혼한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1950년 겨울 해군 수송함을 타고 부산으로 피난 갔고, 한 달 만에 제주로 내려갔다. 생활고 때문에 아내와 두 아들을 1952년 도쿄로 떠나 보낸 것이 사실상의 영이별이었다.
절절한 그림편지로 가족에게 마음을 전하던 이중섭은 4년 뒤 무연고자로 39년의 생을 마쳤다. 생활력 없는 남편, 어린 두 아들의 부양은 마사코의 몫이었다. 목사 가운을 재단해 팔며 생활을 이어갔다. 서귀포에서의 배고픔으로 아버지를 기억하는 장남 태현 씨는 2016년 인두암으로 먼저 세상을 떴다. 둘째 태성 씨는 아버지가 유명한 화가였고,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을 모른 채 자랐다.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뤄진 건 그가 15세 때였다.
오누키 기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했던 것은 쭉 기억하고, 힘들었던 것은 누구도 탓하지 않은 채 그저 운명으로 받아들였던 게 아닐까. 그게 마사코 선생이 101살까지 살아간 힘이었을 것"이라며 1953년 마사코가 이중섭에게 보낸 편지글을 보여줬다. '이렇게 사랑을 받는 저는 전 세계 누구보다 가장 행복합니다. 그 사랑만 있으면 아무것도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충분해요.'
‘겨울연가’ 같은 한류 드라마도 즐겨보던 마사코는 “누군가 이중섭을 연기한다면, ‘욘사마’보다는 이병헌이면 좋겠다”며 웃기도 했다는데….

서귀포 앞바다를 바라보는 마사코 씨. 다큐멘터리 영화 『이중섭의 아내 』 속 한 장면. © 2013 TENKOO/ASIA FILMS/UZUMASA, All Rights Reserved.

서귀포 앞바다를 바라보는 마사코 씨. 다큐멘터리 영화 『이중섭의 아내 』 속 한 장면. © 2013 TENKOO/ASIA FILMS/UZUMASA, All Rights Reserved.

“'아고리의 넋이 나를 건강하게 지켜주고 있구나'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또 만날 수 있겠죠?’하고 말을 걸고 싶어집니다”(2016년 7월 서귀포 이중섭미술관 ‘가족전’ 때 보낸 메시지)라던 마사코는 지난해 8월 13일 남편의 곁으로 돌아갔다.
오누키 기자는 "그의 1주기를 맞아 한국 독자들께 이 책을 소개할 수 있어 다행"이라며 "이중섭의 아내 마사코의 목소리로 그의 한결같은 사랑도 알리고 싶다. 둘의 사랑이 있었기에 이중섭의 작품도 나올 수 있었던 게 아닐까"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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