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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송호근의 세사필담

사막에 줄긋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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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 석좌교수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 석좌교수

쿠르드족은 세 개 국가의 국경선에 넓게 퍼진 세계 최대의 유목민족이다. 1차 대전 이후 유럽 제국들의 등쌀에 끼어 독립국을 세우는 데에 실패했다. 이란, 이라크, 튀르키예 접경 지역에 무려 3500만 명이 흩어져 산다. 접경 지역은 조용할 날이 없다. 토지 문서가 없는 유목인들이 조상이 살던 곳을 자기 땅이라 우긴들 누구도 들어주지 않는다. 군대가 없으니 경계목을 세울 수도 없다. 얼마 전 튀르키예가 쿠르드족을 국경 밖으로 쫓았는데, 과연 쫓아낸 건지 헷갈린다. 조상을 찾아 모래언덕을 다시 건너오는 걸 막을 수 없다. 쿠르드족도 딱하고, 3개 국가도 딱하다. 분쟁이 끊일 날이 없다. 사막에 줄긋기다.

인권과 교권이 맞닿아 분쟁 발생
도리보다 권리를 부추긴 민주화
양육과 훈육이 뒤섞인 교육 현장
개념 분리와 중간 전문기구 절실

사막에 줄긋기, 요즘 문제가 된 아동학대처벌법과 학생인권조례가 딱 그 모양이다. 정서적, 신체적 학대의 경계가 애매모호하다. 학대의 주체가 주로 교사로 상정되기에 학생이 피해를 호소하면 곧장 고소·고발이 가능하다. 10만 명 장애아동이 다니는 특수학교를 위시해 초중등학교에서 고발 행위가 빈번한 이유다. 지난 5년간 1252건이 발생했다고 한다. 문제가 된 교사의 행위가 교육과 훈육이라 아무리 항변해도 사회적 정서는 대체로 학생과 학부모 편이다. 우리의 민주화는 도리(道理)보다 권리를 부추겼다. 독재가 강요한 도리에 이골이 난 상태였다. 도리의 자체 검열이 소멸한 자리에 권리가 극대화됐다. 교육 현장의 인권침해가 자주 문제를 일으키자 CCTV와 녹음기가 비밀병기로 등장하는 세태가 만들어졌다. 몰래 녹음의 불법 여부를 따질 계제가 아니었던 거다. 훈육과 가해의 경계는 사막에 줄긋기와 같아서 학생, 학부모, 교사 간 분쟁이 폭증했다. 서이초 교사의 죽음은 이런 경계선 분쟁이 낳은 비극이다.

한국에서 교육 현장의 폭력은 일상적이었다. 아득한 청년 때 얘기다. 유신 반대 데모가 고등학교에서 일어났다. 상급반 학생들이 운동장으로 몰려나갔다. 선생들이 쫓아갔다. 선두에 선 학생들을 말리다가 얼굴을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시위가 진정되자 선생들은 돌아서서 고개를 떨궜다. 우는 것일까. 그 시대, 선생의 폭력은 독재의 폭력을 방지한 폭력이었다. 누구도 고소하지 않았다. 물론 고소당할 만한 일상적 폭력이 다반사였지만 말이다.

‘지도 편달’이란 용어가 있다. ‘편달’-채찍 편(鞭), 매질할 달(撻), 즉 매질해서 지도해달라는 뜻인데 요즘 그랬다간 학대다. ‘많은 질정을 바랍니다’-질정(叱正), 즉 꾸짖어 바로잡아 달라는 말이었다. 꾸짖는다? 꾸짖었다가는 모욕죄로 걸린다. ‘지도 편달’과 ‘질정’에 함축된 동양적 미덕과 겸손은 민주화 공간에서 불완전 변이를 일으켰다. 권리 일색, 2021년 한국엔 형사 150만 건, 민사 85만 건이 발생했다. 사전 조정기구가 없어서다. 교육 송사가 한몫했다.

교육, 훈육, 생활지도라는 세 가지 대면 행위가 주업인 교육자들은 일상적 위험에 처해 있다. 설득하다 안 되면 입을 닫는 것이 안전하다. 인권과 교권의 모호한 경계선에서 분쟁이 발생한다. 무엇이 고의(故意)인가? 선의와 악의의 경계선은 어디인가? 경찰과 사법부도 헷갈린다. 인권과 교권이 서로 맞닿아 있어 그렇다. 학부모는 교사에게 아동을 위탁한다. 그때 부모의 ‘양육’이 그대로 이관되는 것은 아니다. 교사에게 자녀를 위탁하는 순간 양육(養育)은 ‘훈육’(訓育) 개념으로 전환된다. 훈육 내에는 도리가 우선, 권리는 다음이다. 그러기에 애지중지한 부모의 심정은 훈육 영역에서는 꾸지람(질정)과 등가일 수 있다. 물론 꾸지람도 상식의 범위를 벗어나면 안 된다. ‘선생님 이제 큰일 났어요, 우리 아빠 올 거예요.’ 야단맞은 학생의 원군(援軍)이 온다니 교사는 전전긍긍이다. ‘정신적 습관을 배양하기 위해 의지 활동을 지도하는 것’이 훈육의 사전적 정의다. 원군은 양육개념을 교사 행위에 그대로 투사해서 왜 다르냐고 다그칠 것이다. 훈육은 증발한다. 현행법 모두 양육과 훈육을 뒤섞은 규범적 오류를 안고 있다. 다툼이 발생하고 판례도 갈 지(之)자다.

일단 양육과 훈육의 영역 분리가 최선이다. 양육과 훈육 간 개념 거리를 띄우고 조정지대를 설정하는 것, 이것이 법안 개정의 초점이다. 양자가 접합된 상태에서 시비를 가리는 것은 사막에서 국경선 다툼과 같다. 우선 교사들이 준수할 상세한 훈육 지침을 명시해야 한다. 친구들 앞에서 바지를 내렸다면, 연필로 친구 이마에 상처를 냈다면, 그게 장난일지라도 못 본 척하면 교사의 직무유기다. 판단은 중간지대 전문가로 구성된 공적 기구가 맡으면 된다. 교사와 학부모가 직접 맞붙으면 송사로 번진다. 현행 교권보호위원회가 있지만 비전문가 집단이고, 이를 활용하는 교사는 드물다. 교사가 어찌 학생을 고발하겠는가.

민주화가 부추긴 권리장전은 사회 도처에서 권리투쟁을 일으켰다. 그늘은 많이 없어졌지만, 새로운 그늘이 늘어났다. 인성교육이 절실한 이때 경찰과 사법부 문턱은 폭풍 민원으로 닳는다. 법정으로 가는 교육, 바람 잘 날 없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