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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경제 발목 잡았다…美신용등급 강등시킨 '벼랑 끝 워싱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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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미국 워싱턴의 '벼랑 끝 정치'가 국가 신용등급까지 강등시켰다. 부채 한도 상향을 놓고 20여 년 이어진 정치권의 극한 대립에 글로벌 신용평가사 피치는 1일(현지시간) 미국 신용등급을 'AAA'에서 'AA+'로 한 단계 내렸다.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3대 국제 신용평가사가 미국 신용등급을 내린 것은 역사상 두 번째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2011년 정치권 협상 난항에 따른 국가 채무불이행(디폴트) 가능성을 우려해 미국 신용등급을 AAA에서 AA 로 내렸고,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무디스가 유일하게 최고 등급(Aaa)을 지키고 있다.

피치는 이날 평가보고서에서 "미국 등급 하향 조정은 향후 3년간 예상되는 재정 악화, 국가채무 부담 증가, 거버넌스 악화 등을 반영했다"고 밝혔다. 디폴트 위험에도 집권 민주당과 야당인 공화당이 양보 없는 대치 국면으로 치달아 국가 신용도를 떨어뜨리는 사태로 이어지게 했다는 지적이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 중 하나인 피치(Fitch). AP=연합뉴스

세계 3대 신용평가사 중 하나인 피치(Fitch). AP=연합뉴스

국가 운영 볼모로 정쟁

피치는 지난 6월 1일 가까스로 미 의회를 통과한 연방정부 부채 한도 상향 합의안에 주목했다. 연방정부가 디폴트에 빠지지 않으려면 의회가 부채 한도를 올리거나 한도 적용을 유예해야 하는데, '큰 정부'(지출 확대)를 선호하는 민주당과 '작은 정부'(지출 축소)를 지향하는 공화당은 국가 운영을 볼모로 막판까지 마주 보고 달렸다.

피치는 보고서에서 "재정 및 부채 문제를 포함해 지난 20년간 거버넌스 기준이 꾸준히 악화했다"면서 "부채 한도를 놓고 반복되는 정치적 교착 상태와 막판 합의는 재정 관리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켰다"고 밝혔다. 이 때문에 이번 강등 사태를 놓고 "정치적 합의를 이뤄내지 못하는 정치 부재가 미국에 대한 믿음을 훼손 시킨 꼴"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피치는 신용등급 강등의 근본적인 요인으로 재정적자 악화를 지적했다. 세수가 줄고 재정 지출은 증가하는 추세에서 금리 인상으로 이자 부담이 커지면서 재정적자 악화를 우려했다. 재정적자가 2022년 국내총생산(GDP) 대비 3.7%에서 2023년 6.3%, 2025년 6.9% 수준으로 급등할 것으로 전망했다.

백악관과 의회가 치열한 접전 끝에 초당적 합의안을 타결했지만, 차기 대선(2024년 11월) 이후인 2025년 1월까지 부채 한도 적용을 유예한 것이어서 문제를 임시 봉합했을 뿐이라고 봤다. 또 여느 선진국과 마찬가지로 미국도 인구 고령화와 의료비 증가에 따라 재정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밖에 없는데, 사회보장 지출 증가에 대한 중기적 대비가 더디다고 지적했다.

 지난 6월 1일(현지시간) 미국 연방정부 부채한도 합의안이 상원을 통과했다. 미 상원은 이날 연방정부 부채한도를 2025년까지 2년간 유예하는 내용의 ‘재정책임법 2023′을 찬성 63표, 반대 36표, 기권 1표로 통과시켰다. AP=연합뉴스

지난 6월 1일(현지시간) 미국 연방정부 부채한도 합의안이 상원을 통과했다. 미 상원은 이날 연방정부 부채한도를 2025년까지 2년간 유예하는 내용의 ‘재정책임법 2023′을 찬성 63표, 반대 36표, 기권 1표로 통과시켰다. AP=연합뉴스

도 넘는 정쟁, 2011년 닮은꼴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에도 정쟁이 국가 신용등급에 부정적 영향을 줬다. 지난 2011~2014년까지 부채 한도는 3번이나 유예 조치됐다. 2013년에는 연중 내내 부채 한도 협상 줄다리기를 하다 약 2주 넘게 '셧다운'을 경험했다.

미국의 부채 한도는 사실상 시한폭탄이다. 고령화와 의료비 증가에 따라 재정 악화가 가중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미 통계청에 따르면 미국은 2021년 현재 65세 이상 인구의 비율이 16.8%로 초고령사회에 다가서고 있다.

실제로 피치는 이번 보고서에서 미국의 메디케어(의료보험)와 사회보장 지출이 2033년까지 국내총생산(GDP)의 1.5%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와 관련해 보고서는 "향후 10년간 금리 상승과 부채 증가로 인해 이자 상환 부담이 증가하고, 인구 고령화와 의료비 상승으로 재정개혁이 없는 한 고령층에 대한 지출이 증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정치권은 여전히 '네 탓' 공방 

12년 만의 신용도 하락에 조 바이든 행정부는 강하게 반발했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피치의 결정은 자의적이며, 오래된 데이터에 기초했다"며 "피치의 정량분석 모델에 따르면 많은 지표가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시절인 2018~2020년 하락한 뒤 현재 개선되고 있지만, 이제까지 아무런 대응이 없었다"고 비판했다.

정치권은 여전히 '네 탓' 공방이다.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무모한 벼랑 끝 전술, 디폴트 가능성을 남발한 건 공화당"이라며 책임을 돌렸고, 민주당 하원 세입위원회는 트위터를 통해 "공화당이 만들어낸 채무불이행 위기의 결과물"이라고 공격했다.

월가는 긴장하고 있다. 국가 신용등급 하락은 국가 차입 비용을 증가시킬 뿐 아니라 투자자 태도에도 영향을 미친다. 2011년 S&P가 최초로 미 신용등급을 강등했을 당시엔 일 주일여 동안 미 증시가 15% 폭락했다.

다른 신용평가사인 무디스가 여전히 미국에 대해 최고등급인 Aaa를 부여하고 있어 영향이 미비할 것이란 시각도 있다. 윌밍턴 트러스트의 루크 틸리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단일 신용평가기관인 피치의 강등으로 투자자들이 미 국채에서 갑자기 발을 빼진 않을 것"이라고 했다.

지난 5월 28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캐빈 메카시 하원의장과 미국의 채무불이행(디폴트)을 막기 위한 부채 한도 협상에서 최종 합의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5월 28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캐빈 메카시 하원의장과 미국의 채무불이행(디폴트)을 막기 위한 부채 한도 협상에서 최종 합의했다는 내용을 전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뼈아픈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비영리단체인 '책임 있는 연방 예산위원회(CRFB)'의 마크 골드웨인 수석 부사장은 워싱턴포스트(WP)와의 인터뷰에서 "등급 강등 자체가 차입 비용의 급격한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면서도 "추가 강등이 있을 경우 결국 연방 정부의 재정 건전성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이번 강등은 미국에 큰 경고 신호가 돼야 한다"며 "미국의 경제가 튼튼하고 투자하기에 좋은 곳이지만, 우리가 지금과 같은 길을 계속 간다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서정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최근 미국 정치권에서 예측 불가능성을 증폭시키는 일이 많아지면서 시장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며 "한국 정치권에서도 정쟁이 증폭할 경우 정치가 경제 발목을 잡는 형국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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