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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에도, 주말에도 '온콜' 대기 중…심장내과 의사 73% 번아웃 [심장질환 진료 붕괴]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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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더는 의사 개인의 희생으로 막을 수 없습니다.”

심혈관 질환 진료체계 붕괴와 관련해 현장 의사들은 한 목소리로 이렇게 호소한다. 둑에 구멍이 나 온몸으로 막고 있지만 더는 버티기 힘든 상황이라고 표현한다. 필수의료 붕괴와 관련, 신현웅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국회 토론회에서 “그동안 의료비 부담을 낮춰 건강보험 보장률을 높이는 데 집중했다. 의료 공급 안 되는 분야를 지원하려는 노력이 부족했다”고 진단했다.

심장혈관중재 시술 분야 의사는 베이비붐 세대(1955~63년생)가 1세대이다. 이들의 은퇴가 이어지고 있고, 대형병원 중진급 의사들의 이탈이 도미노처럼 번지고 있다. 전임의·전공의 신규 유입은 점점 줄어든다. 당장 필요한 대책은 중진급 의사의 이탈 방지와 대형병원 유턴이다. 중기적으로는 신규 유입 확대이다.

정의석 강북삼성병원 흉부외과 교수는 “심혈관 분야를 기피하는 근본 원인은 책임과 의무는 강조하면서도 보상은 적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시스템은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심장 의사들은 “난이도와 위험성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진료 수가를 적정 수준으로 정상화해야 한다”고 말한다.

10일 서울 강서구 이대서울병원 응급실에서 의료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김종호 기자

10일 서울 강서구 이대서울병원 응급실에서 의료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김종호 기자

수가(국가가 정한 의료 서비스 가격)를 인상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빠지지 않는다. 예컨대, 대동맥판막이 좁아져 피가 제대로 돌지 못하는 협착증 치료에 쓰이는 ‘경피적 대동맥판막 삽입술(TAVI)’은 고난이도에 시술 시간도 길지만, 상대적으로 수가가 낮게 책정된 시술로 꼽힌다. 배장환 충북대병원 심장내과 교수는 “고령의 중증 환자들에게 필요한 시술임에도 불구하고, 수가가 낮으면 병원에서는 못하게 한다”며 “이런 시술의 수가를 현실화해 인력 충원에 쓰고, 노동 강도에 맞게 급여를 높여야 (필수과를 기피하는) 전공의들 생각도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정의석 교수도 “수술이 어려워질수록 상대적인 수가는 낮게 책정된다”며 “낮은 수가로 인해 치료 재료가 들어오지 않아 의사들이 재료를 구하기 위해 정부와 의료기 회사로 뛰어다니기도 한다”고 말했다.

당직과 온콜(전화 대기) 등을 제대로 보상하는 급여 정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응급환자가 많은 심혈관질환 특성상 흉부외과·심장내과 의사들은 야간이나 주말에도 대기 상태로 있는 시간이 길다. 각 학회 조사에 따르면 전문의 절반 이상(흉부외과 51.7%, 심장내과 73%)이 ‘번아웃’을 호소한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황진용 경상대병원 순환기내과 교수는 “해외 일부 국가는 의사가 응급시술에 대비해 대기한 시간에 대해서도 실제 시술했을 때와 같은 수당을 지급한다”며 “반면, 한국은 대기 당직에 대한 보상이 없어, 의사뿐 아니라 시술에 필수 인력인 의료기사들까지 우리 분야를 기피한다”고 말했다. 배장환 교수는 “48시간 연속 근무 후에는 최소 24시간을 쉬도록 하는 등 근무시간을 제한하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의료소송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는 것도 의사들을 붙잡아 두기 위한 필수 대책으로 꼽힌다. “명백한 실수가 아닌, 중환자를 치료하면서 생기는 문제에 대해서는 소송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해줘야 한다”(김경환 서울대병원 심장혈관흉부외과 교수)는 것이다. 황진용 교수는 “(치명률이 높은) 심장질환은 환자가 갑작스레 사망하는 경우가 많지만, 과실이 명백하지 않을 때에도 담당 의사가 소송에 시달린다. 이 분야를 지망하던 젊은 의사들도 소송 위험 때문에 가장 많이 그만둔다”며 “무과실 분만사고에 대해선 국가가 보상해주는 법이 통과된 것처럼 의사의 부담을 덜어주는 제도가 심장 분야에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부도 손 놓고 있기만 한 건 아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2018년 심뇌혈관질환에 대한 응급대응 체계 구축 등의 대책을 담은 ‘제1차 심뇌혈관질환관리 종합계획’을 수립해 추진해왔다. 지난달 31일에는 서로 다른 병원 소속 전문의가 응급 상황에 대응할 네트워크를 꾸리면 건강보험 수가를 지급하는 ‘인적 네트워크 시범사업’ 등이 포함된 제2차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다만 정부가 지정한 14개 권역심뇌혈관질환센터(권역센터) 중 11개 센터에는 지난 2018년 이후 진료체계 운영비가 끊기는 등 현장에선 정부의 인력·재정 확보 의지에 의구심이 있는 상황이다. 영남권 한 권역센터에서 근무하는 A 교수는 “권역센터 의사로서 책임감을 더 느끼지만, 정부 예산으로 지원받던 당직비도 삭감될 뻔했다가 겨우 다시 유지되는 등 예산이 충분치는 않다”며 “안정적인 체계를 만들려면 인적 자원을 투입하는 게 필수지만, 정부에게 그럴 의지는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또 다른 영남권 권역센터 소속 B 교수는 “권역센터로서 평가 점수를 맞추기 위해서는 적정 인력을 확보해야 하는데, 각 센터에서 알아서 뽑아 운영해야 해 인력 유지에 대한 부담이 항상 있다”고 말했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이 31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제2차 심뇌혈관질환관리 종합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이 31일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제2차 심뇌혈관질환관리 종합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당장 인력을 늘릴 수 없다면, 예방과 신속한 이송체계 구축으로 구멍을 메워야 한다. 질병관리청의 2021년 시·도별 통계에 따르면, 심근경색증 조기증상 인지율이 충남에서 37.5%로 가장 낮았고, 가장 높은 곳(제주)도 54.9%로 절반을 겨우 넘었다. 황진용 교수는 “시골 어르신들은 심근경색 등의 심장병을 초기에 인지하지 못해 골든타임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며 “정부가 가장 먼저 할 일은 심혈관질환을 교과서에라도 실어서 대국민 인식을 개선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구급대원들이 심전도를 보고 응급 수술이 가능한 병원으로 바로 올 수 있도록 하는 등 이송체계 인프라 구축에 관해서도 할 수 있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심혈관질환 응급체계가 전국 어디서건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개별 지방자치단체의 역할도 강화돼야 한다. 권역심뇌센터는 현재 국고 지원 100%인 민간보조사업으로, 지자체 참여는 미흡한 상황이다. 신영석 고려대 보건대학원 연구교수는 “응급 의료의 경우 지방에서 감당해야 해 지자체 역할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관련 정책은 대부분 중앙 단위에서 결정되는 상황”이라며 “예산을 어디까지 중앙에서 담당하고 어느 정도 지방정부에 위임할지 등 전체적인 틀을 정비하고 총체적으로 지방의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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