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채병건의 시선

국정원 대변인, 15개월 동안 3번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8면

채병건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Chief에디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채병건 국제외교안보 디렉터

국가정보원 조직 중에서 대외적으로 노출된 분야는 대변인실 정도다. 직함이 뭔지 공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실무 조직이다.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지난해 5월 출범한 이후 임명된 국정원 대변인이 잇따라 바뀌면서 벌써 세 명째가 됐다. 정부기관에서 1년 3개월 동안 대변인이 세 명째라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사기업에서도 찾기 어려울 것이다. 개인적 사유 등도 있었다고는 하나 대변인을 빈번하게 바꿀 정도면 국정원 내부 인사가 요동쳤던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내부 인사 잡음으로 조직 동요
언제까지 지난 정부 탓할 건가
알력 잠재우고 신뢰 회복해야

지난달 느닷없이 튀어나왔던 국정원 인사를 둘러싼 알력설은 현 국정원 지도부 체제가 지속하면서 일단락됐다. 하지만 국민의 우려까지 일단락된 것 아니다. 사람들이 의아해했던 건 새 정부가 출범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왜 인사를 둘러싼 잡음이 나오는지다.

국정원은 알려진 이상으로 하는 일이 많은 조직이다. 알려지지 않을 뿐 나라 안팎에서 여러 일을 한다. 국내외 간첩 탐지, 탈북자 합동 심문, 산업기술 유출 색출, 해킹 방지 및 적발, 테러 정보 파악 및 대응 등은 익히 알려진 국정원 업무인데 모두 비공개 작전이거나 비공개 활동이다. 그래서 국익을 위한 합법적 목적이라 할지라도 국정원 활동이 구체적으로 노출되면 대체로 사달이 나곤 한다.

대한민국 정보당국의 정보 획득 수단과 방법, 상대가 공개되면서 장기간에 걸쳐 구축했던 정보 라인이 순식간에 날아갈 수 있다. 간첩 수사가 그렇다고 한다. 현 정부에서 국정원은 그간 수사를 바탕으로 창원간첩단 사건 등을 기소했는데 일단 기소하면 공소장과 재판 과정을 통해 국정원이 어디서 어떻게 채증했는지가 공개돼 해당 수사 기법이 사장되는 경우도 있다. 북한도 알았기 때문이다.

망신살을 당할 때도 있다. 2011년 인도네시아 특사단이 묵는 호텔 숙소에 침입했다 들켰던 국정원의 ‘작전’은 한국 정보기관이 얼마나 어리숙한지를 그대로 보여준 단면이었다. 외교 문제로 비화되지 않았지만 이면에선 인도네시아 정부를 달래기 위해 하지 않았어도 될 양보를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국정원은 ‘나라를 위해 무엇을 했다’로 평가받는 조직이 아니라 ‘알려지지 않았지만 나라를 위해 무엇을 했다’로 평가를 받는다. 임무 수행 중 목숨을 버려도 이름을 알려 기리지 못하는 조직이 국정원이다. 국정원에 마련된 ‘이름 없는 별’ 19개 중 공개된 분은 1996년 러시아에서 북한 마약을 조사하다 피살됐던 고 최덕근 영사뿐이다. 우리는 고 최 영사를 통해 돌아가신 이름 없는 영웅들이 엄중한 현장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업무를 수행했을지를 유추할 수 있다.

국정원 활동엔 이런 일도 하나 싶은 내용도 있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앞두고 국정원이 침공 관련 정보를 파악해 동맹국에 전달했다는 얘기가 있었다. 국정원이 이를 공개 확인한 적은 없는데 첩보가 시의적절했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다. 10여년 전 전직 청와대 실무진으로부터 들었던 일화 중엔 남북 관계가 좋았던 김대중 정부 시절임에도 국정원 일선에선 남한에서 만든 사극 등 방송 드라마의 비디오테이프를 북·중 국경 지대에 거의 공짜로 뿌렸다는 얘기가 있었다. 북한에 들여보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한국과 외교 관계가 없는 제3국에도 당국자가 필요할 때가 있는데 이를 위해 새 명함을 판 국정원 백색 요원이 현지에 머물기도 한다.

이처럼 국정원은 현 정부 들어 복구한 원훈대로 음지에서 일하면서 양지를 지향한다. 그런데 수면 아래에서 움직였어야 할 조직이 인사를 놓고 잡음을 만들었으니 논란을 자초했다. 무엇보다 지금 국정원은 대공수사권 유지라는 숙제를 안고 있다. 국가보안법 혐의 사건은 기소도, 공소 유지도 극히 까다롭다. 재판부는 엄정하게 물증을 요구하고 있고, 간첩단 하나를 잡는 데 10년이 걸린다는 얘기 역시 과장이 아니다. 해외 방첩 수사를 위한 대공수사권 유지의 필요성을 알리고 여론을 설득하고 신뢰를 회복해야 할 국정원에서 도리어 알력설이 불거졌다는 게 부끄러운 일이다.

국정원이 분열과 갈등을 빚는 근본 원인은 지난 정부에서 자기들의 대북 정책 입맛에 맞춰 조직과 인사를 뒤흔들어놨기 때문이라고 해명해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정부 출범 후 15개월이나 흘렀다. 그런데도 잡음이 생기는 건 조직 정비가 완료되지 않았고 일할 채비도 완전히 갖추지 못했다는 반증이다. 당국자들이 일제히 일단락됐다고 하니 지켜보겠지만 대한민국 국민은 더는 알력설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