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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남긴 선조들의 ‘인증샷’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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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국립전주박물관이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 개최를 기념하는 특별전을 1일부터 10월 29일까지 연다. 사진은 전시품인 채용신의 ‘평생도’. [연합뉴스]

국립전주박물관이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 개최를 기념하는 특별전을 1일부터 10월 29일까지 연다. 사진은 전시품인 채용신의 ‘평생도’. [연합뉴스]

10폭 병풍의 중앙인 5폭에서도 가운데쯤. 경운궁(옛 덕수궁) 흥덕전에서 사모에 녹색 관복을 입은 화가가 붉은 용포 차림의 태조 이성계를 화폭에 담고 있다. 바로 옆에 면류관을 쓴 고종과 순종이 지켜보고 있다. 때는 1900년, 화가는 당시 50세의 채용신(1850~1941)이다. 1897년 아관파천을 끝낸 고종은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했고, 정통성 확립 차원에서 이성계 어진(御眞)을 경운궁 선원전에 봉안키로 했다.

당시 전주에서 화원으로 활동하던 채용신이 왕의 부름을 받았다. 평생 화업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날이었을 테고, 그는 이 기억을 훗날 ‘평생도’라는 10폭 병풍으로 남겼다.

원래 18세기 말, 19세기 세도가들이 부와 영예가 자손 대대로 이어지길 바라면서 일생의 중요 순간들을 그리게 한 게 평생도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이 있었다면 ‘인증샷’을 남겼겠지만 그러지 못했으니 인생 늘그막에 회고하며 주문 제작했다. 채용신의 평생도가 특이한 것은 화가가 직접 자신의 일생을 남겼다는 점이다. 혼례, 초임지 부임 등 인생의 10장면을 담은 이 그림엔 뛰어난 초상화가답게 간략하게 특징을 잡은 그 자신의 얼굴이 뚜렷하다.

조선 후기 문인·화가들의 ‘결정적 장면’들을 기념한 회화 31건, 83점이 한자리에 모였다. 국립전주박물관에서 1일부터 열리는 ‘아주 특별한 순간-그림으로 남기다’ 특별전이다.

국립전주박물관이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 개최를 기념하는 특별전을 1일부터 10월 29일까지 연다. 사진은 전시품인 작가 미상의 ‘서원아집도’. [연합뉴스]

국립전주박물관이 제25회 세계스카우트잼버리 개최를 기념하는 특별전을 1일부터 10월 29일까지 연다. 사진은 전시품인 작가 미상의 ‘서원아집도’. [연합뉴스]

‘아주 특별한 만남’을 주제로 한 1부에선 조선 후기 중인·문인들이 ‘아집(雅集)’, ‘아회(雅會)’라는 이름으로 일상을 함께 즐겼던 문화가 화폭에 비친다. 요즘 말로 ‘인싸’들의 모임도 포착된다. 어느 화창한 봄날의 풍류를 담은 ‘균와아집도’(1763)에는 18세기 대표 화가들이 한데 모였다. 허필(당시 56세)의 발문에 따르면 강세황(51세)이 구도를 잡고, 인물은 김홍도(19세)가, 소나무와 바위는 심사정(58세)이 그렸고 채색은 최북(52세)이 담당했다고 한다. 요즘 말로 ‘컬래버레이션’ 한 셈이다.

2부는 자연 속 특별한 순간들을, 3부는 특별한 행사들을 소개했는데 3부의 사실상 주인공은 채용신이다.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문화유산 중 ‘채용신 초상화’ 3점이 선보인다. 1920년대 그린 초상화에선 눈동자에 빛이 반사된 흰 점이 나타나는 등 서양화의 영향도 엿볼 수 있다.

전시회의 대미를 장식하는 평생도 역시 이건희 컬렉션에서 왔다. 화면 상단의 궁궐 담장 뒤쪽으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기가 휘날리고 있다. 하단엔 당시 경운궁을 지키던 일본군도 같이 그려졌다. 화가에겐 조선의 창업주 어진을 모사하는 감격스러운 날이지만, 열강에 휘둘리던 어수선한 시절을 환기하는 기록화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가 소셜미디어에 올리는 풍경 사진, ‘먹방’ 사진도 훗날 이 시대를 반추해줄 기록이 될지 모른다. 전시는 10월 2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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