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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그림 속 거닐고 가상우주서 ‘달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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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강원도 속초에서 개관하는 뮤지엄엑스는 실감미디어와 확장현실 기술을 통해 가상 우주 체험을 제공한다. [사진 뮤지엄엑스]

강원도 속초에서 개관하는 뮤지엄엑스는 실감미디어와 확장현실 기술을 통해 가상 우주 체험을 제공한다. [사진 뮤지엄엑스]

탁자에 치즈처럼 흘러내린 시계에서 분침이 째깍째깍 움직인다(‘달리, 끝없는 수수께끼’). 꽃잎처럼 머리카락과 드레스자락을 휘날리며 그림 속 여인이 윙크한다(‘알폰스 무하 이모션 인 서울’). 각각 프로젝션 맵핑(프로젝터로 벽면 등에 영상물을 투사) 기술로 재탄생시킨 스페인 화가 살바도르 달리(1904~1989)와 체코 화가 알폰스 무하(1860~1939)의 대표작 전시다. 평면 회화를 디지털 스크린에 옮기되 그림 속 정지된 순간에 움직임을 부여해 3차원 효과를 줬다. 요즘 전 세계적인 트렌드에 맞물려 한국에서도 잇따르고 있는 몰입형 전시(immersive exhibition)다.

지난 22일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알폰스 무하 이모션’이 개막하면서 아르 누보의 거장 무하 작품을 소재로 한 몰입형 전시는 서울에서만 2건이 됐다. 오는 9월 30일까지 그라운드시소 명동에서 열리는 ‘알폰스 무하: 더 골든 에이지’도 그의 주요 작품(‘지스몽다’ ‘슬라브서사시’ 등)을 생애 설명과 함께 50분짜리 미디어 아트로 구현한다.

강원도 속초에서 개관하는 뮤지엄엑스에선 관객과 인공지능(AI)이 상호작용하는 미디어 아트가 선보인다. [사진 뮤지엄엑스]

강원도 속초에서 개관하는 뮤지엄엑스에선 관객과 인공지능(AI)이 상호작용하는 미디어 아트가 선보인다. [사진 뮤지엄엑스]

앞서 지난달 15일 광진구 그랜드 워커힐 호텔 ‘빛의 시어터’에서 개막한 ‘달리, 끝없는 수수께끼’ 전시는 10만 관객을 향해 가고 있다. 호텔 내 1963년 개관한 한국 최초의 대형 공연장을 리모델링해 최고 높이 21m 가량의 벽을 포함한 전시장 전면에 수수께끼 같은 달리 그림을 투사한다. 60대의 스피커를 통해 프로그레시브록 그룹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 등 강렬한 음악이 진동하는 동안 천정부터 바닥까지 촘촘하게 아우르는 120대의 프로젝터가 작품 이미지를 해체·조립하고 증강시킨다. 거리두기식 감상이 아니라 오감을 사로잡는 몰입 체험이 초점이다.

내달 4일 강원도 속초에서 개관하는 뮤지엄엑스도 이런 체험형 뮤지엄 목록에 추가됐다. 미디어 아트 기반의 상업 전용관으로 흥행에 성공한 일본의 ‘팀 랩’이나 국내 ‘아르떼 뮤지엄’(제주·강릉·여수)처럼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아트, 테크, 놀이’를 표방한다. 지난 25일 취재진에 공개한 4층 건물 내부는 전시장이라기보다 인공지능(AI) 등 첨단기술 기반의 테마파크에 가까웠다. 16개의 섹션에 걸쳐 고화질 빔 프로젝터와 총 2200만 개의 LED로 구현하는 빛과 영상을 천정·벽·바닥의 경계 없이 투사하고, 스스로 미디어 아트를 창작할 수도 있는 놀이터를 만들었다. 가상의 우주에서 달이 뜨고 지는 것을 지켜보는, 말하자면 디지털 ‘달멍’(달을 멍하게 응시)하는 체험도 이채롭다. 현장을 둘러본 신수진 문화기획자(한국외국어대 초빙교수)는 “코로나19를 거치면서 가상현실(VR) 활용이 일상화됐고 이로 인해 미디어 몰입형 전시도 대중화됐다”고 말했다.

서울 그랜드 워커힐 빛의 시어터에서 열리고 있는 ‘달리, 끝없는 수수께끼’ 몰입형 전시. [사진 ⓒ Salvador Dali, Fundacion Gala-Salvador Dali, c/o SACK 2023 ⓒTMONET]

서울 그랜드 워커힐 빛의 시어터에서 열리고 있는 ‘달리, 끝없는 수수께끼’ 몰입형 전시. [사진 ⓒ Salvador Dali, Fundacion Gala-Salvador Dali, c/o SACK 2023 ⓒTMONET]

미디어 아트 기반의 몰입형 전시는 작가 사후 70년이 지나 저작권으로부터 자유로운 인상파 작품이 우선적으로 소재가 됐다. 영국 일간 가디언에 따르면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이 분야의 ‘록스타’로 꼽힌다. 올 상반기엔 데이비드 호크니(86)가 영국 런던에서 자신의 작품에 바탕한 몰입형 전시를 열어 화제가 됐다.

국내에서 몰입형 전시가 본격 흥행 궤도에 오른 건 2018년 제주 ‘빛의 벙커’의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전시가 꼽힌다. 서울에서도 흥행해 누적 관객 100만 명을 끌었다. ‘빛의 벙커’에선 현재 폴 세잔(1839~1906)을 소재로 한 미디어 아트를 전시 중이다. 2012년 프랑스 남부 채석장을 개조해 만든 ‘빛의 채석장’에서 클림트 전시를 흥행시킨 프랑스 ‘컬처 스페이스’의 작업물을 국내 업체 티모넷이 들여왔다. 박진우 티모넷 대표는 “작품을 잘 아는 사람에겐 새로운 경험을, 잘 모르는 이들에겐 입문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다만 이 같은 대중 전시가 첨단 미디어 아트를 내세우긴 해도 현대의 아방가르드 전시와는 별개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 있다. 안현정 미술평론가(성균관대박물관 학예실장)는 “미술을 매개로 체험형 소비를 하는 것이지, 다음 세대 아티스트에 충격을 줬던 백남준식 미디어 아트와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고 했다. 그 자신이 체험형 전시를 개척해가는 현대 아티스트의 작업과 고흐·달리 등 기존 IP(지적재산권)를 활용한 상업 전시를 혼동하지 말자는 취지다. 신수진 문화기획자는 “세계 최고 기술력의 한국이 잘 풀어낼 수 있는, 우리 IP 바탕의 전시 확장 노력이 계속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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