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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개의 함정과 한국의 대전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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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마이클 그린 호주 시드니대 미국학센터 소장·미 CSIS 키신저 석좌

마이클 그린 호주 시드니대 미국학센터 소장·미 CSIS 키신저 석좌

국제관계 역학 구도에 대해 정책입안자와 정치인은 언제나 현인의 말을 차용하는 경향이 있다. 미·중 분쟁의 위험성에 대해 하버드대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가 사용하기 시작한 ‘투키디데스의 함정’이 좋은 사례다. 지중해 패권을 놓고 부상하던 스파르타(중국)와 기존 강대국 아테네(미국) 사이의 충돌은 필연이라고 진단한 고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시각을 빌렸다. 불행하게도 두 강대국은 그 함정에서 빠져나올 길을 알지 못했다.

앨리슨 교수는 10년 전 미·중 양국이 두 개의 강대국으로 공존하는 체계 구축을 조언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그 제안이 마음에 무척 들어 중국공산당 지도부 전원에게 앨리슨 교수의 논문을 읽도록 지시했다. 2013년에는 당시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신형 대국 관계’ 모델을 제안했다.

‘투키디데스 함정’과 ‘미국 함정’
중국, 미국 패권에 도전한 상황
중국 일깨우는 한국 역할 기대

한국식 도광양회전략 절실하다. [일러스트=김지윤]

한국식 도광양회전략 절실하다. [일러스트=김지윤]

이 모델에 따르면 미국은 전통적 정책을 버리고 미·중 전쟁을 피하기 위해 중국과 협상에 나서야 했다. 중국이 말하는 핵심 이익에 대해 미국이 타협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대만·신장·티베트·동중국해·남중국해·서해 등이 여기에 포함됐다. 결국 오바마 행정부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투키디데스와 앨리슨 교수가 지적했던 구조적 문제는 여전히 존재한다.

최근 브루킹스 연구소의 로버트 케이건 박사가 ‘미국 함정(America trap)’이란 새로운 화두를 제시했다. 그의 결론은 새롭게 부상하는 독재 강국은 필연적으로 미국의 힘과 결의의 깊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미국이나 우방국을 공격하는 자해성 어리석음을 범한다고 지적한다. 1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이나 1941년의 일본과 독일이 그런 사례다.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 모두 1950년 6월 이러한 미국 함정에 빠지는 바람에 미국이 역사상 최대 규모의 동맹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결과를 낳았다. 후에 옛 소련의 붕괴로 이어졌고, 향후 북한과 중국의 붕괴로 이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가장 최근의 미국 함정 사례다.

전체주의 정권은 왜 미국 함정에 빠지는가. 전체주의 국가의 성격상 그들은 미국 정치와 문화를 그들만의 왜곡된 이념의 렌즈에 비춰보고 다양성과 논의, 사회적 진보 및 정치적 양극단화를 재생이 아닌 쇠퇴로 인식하는 듯하다. 전체주의 국가의 지도자는 투키디데스 딜레마의 필연성을 믿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충동이 필연적이라면 미국이 준비하기 전에 먼저 공격해 미국의 역내 패권 야심을 좌절시키려 한다.

마지막으로 케이건 박사가 강조하듯 부상하는 신흥 강국에 대한 미국의 무관심과 결의의 부재도 이유가 될 수 있다.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북한은 미국이 동북아 방어선인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을 제외하자 그 틈을 타 한국전쟁을 일으켰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아시아와 글로벌 정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한국은 미국 동맹 체제의 굳건한 확신을 상징한다. 따라서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질서가 쇠락하고 있다는 미국의 ‘도전자들’의 오판을 상쇄시킬 수 있다.

둘째, 한국은 투키디데스 함정에 빠지면 안 된다. 박근혜·문재인 정부에서는 미·중 경쟁이 아시아 국제 정세의 핵심 요소로 인식되면서 각종 정책이 펼쳐진 듯하다. 이렇게 되면 중국에는 미국과의 상호 공존이냐 전쟁이냐 두 가지 옵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강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윤석열 대통령은 인도·태평양 전략의 무대에 참여함으로써 중견국의 전략적 이익도 고려해야 한다는 인식을 중국에 심어줬다.

셋째, 한국은 민주적 절차가 때론 허점이 있더라도 전략적 약점이나 결의의 부재가 아니라는 점을 중국에 상기시켜 줄 수 있다. 윤 정부에서 한국의 역동적인 민주주의는 다시 한번 아시아 국가가 보편적 규범을 힘과 역동성의 원천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끝으로 한국은 중국과 경쟁하는 미국의 전략 정립을 도와서 중국의 강압을 저지하고 민주적인 세계의 핵심 기술을 보호할 수 있다. 그러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중국이 생각할 수 있는 완전한 디커플링이나 자해적인 조치를 피하는 방향으로 그 과정을 진행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함정은 우리가 빠질 때만 함정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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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그린 호주 시드니대 미국학센터 소장·미국 CSIS 키신저 석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