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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사장 세비귤, 은행원 송계지…달라진 현실, 여전한 편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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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우리은행 안산외국인특화지점의 송계지 계장. 서지원 기자

우리은행 안산외국인특화지점의 송계지 계장. 서지원 기자

지난 24일 경기도 안산시의 우리은행 외국인특화지점. 창구에선 영어·중국어·태국어 등 다양한 언어가 흘러나왔다. 한 직원은 “패스워드 원 모어 타임(비밀번호 한 번 더)”이라고 말했고, 옆자리 직원은 중국어로 정확한 송금 액수를 확인했다. 이 지점에는 중국·필리핀·러시아권 등 외국 출신 직원이 12명 있다.

중국에서 온 송계지 계장은 “고객의 모국어로 응대하면 일 처리가 빠르고 고객 만족도도 높다”고 설명했다. 그는 2012년 ‘피크 타이머(통역 계약직)’로 일을 시작했다가 능력을 인정받아 정규직 전환됐다. 연말마다 부산에서 찾아와 해외 송금을 맡기는 중국인 단골 고객도 있다. 송 계장은 “한국에서 배운 은행 업무가 체질이었다. 외국인이라 못한다는 소리가 없게끔 책임감을 갖고 일해왔다”고 했다. 하나은행도 본점 외국인근로자마케팅팀에서 외국인 직원을 고용하는 등 시중은행의 외국인 고용이 늘고 있다.

한국에 온 외국인들의 경제활동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단순 노동직뿐 아니라 은행원 같은 화이트칼라 직종과 자영업에도 진출한다. 한국에 외국인 인구가 늘면서 생긴 자연스러운 변화다. 26일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국내에 상주하는 외국인 인구는 164만 명으로 한국 전체 인구의 3.2% 수준이다. 코로나19 시기에 닫혔던 국가 간 인구이동 빗장이 풀리면서 지난해(130만 명)보다 약 34만 명 늘었다. 외국인 인구는 2040년에는 216만 명, 한국 전체 인구의 4.3%에 달할 전망이다.

서울 해방촌 카페 ‘흑해’의 데미르 세비귤(왼쪽)과 쇼로바 디아나 사장. 서지원 기자

서울 해방촌 카페 ‘흑해’의 데미르 세비귤(왼쪽)과 쇼로바 디아나 사장. 서지원 기자

데미르 세비귤(30·튀르키예)과 쇼로바 디아나(28·러시아)는 지난달 서울 용산구 해방촌에 카페를 함께 차렸다. 이들은 국내 한 기업에서 연구원으로 일했던 동료 사이다. “누구나 편하게 올 수 있는 카페를 차리자”는 목표로 수년간 창업 자금을 모았다. 외국인이라 은행 대출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결국 한국에서 자신들의 꿈을 이뤘다.

개업 전에는 ‘외국인이 장사하니까 시끄러울 것’이라는 편견도 겪었다. 두 사장은 “불편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 연락 달라”며 이웃들에게 넉살 좋게 카페 명함을 나눠줬다. 지금은 이웃들이 이들에게 인사를 건네는 것은 물론, 끼니를 챙길 정도로 친하게 지낸다.

서울 암사동 카페 ‘라모카’의 이탈리아인 사장 마테오. 서지원 기자

서울 암사동 카페 ‘라모카’의 이탈리아인 사장 마테오. 서지원 기자

세비귤·디아나처럼 자영업에 종사하는 외국인 ‘사장님’은 계속 늘고 있다. 외국인 근로자 가운데 비임금근로자 비율은 지난해 6%를 기록했다. 2012년(3.8%) 이후로 매년 증가세다. 비임금근로자란 자영업자와 무급가족종사자를 의미한다.

지난 20일 부산에서 열린 ‘2023 부산 지역특화형 비자 외국인 유학생 채용박람회’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이 이력서를 쓰고 있다. [뉴스1]

지난 20일 부산에서 열린 ‘2023 부산 지역특화형 비자 외국인 유학생 채용박람회’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이 이력서를 쓰고 있다. [뉴스1]

외국인 비임금근로자 중 무급가족종사자를 제외한 순수 자영업자는 지난해 4만3200명이다. 2021년(3만7100명)보다 6100명(16.4%) 늘었다. 창업 문턱을 넘을 만큼의 자본과 언어능력, 사회적 지위 등을 갖춘 외국인이 많아진 것으로 풀이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창업 관련 지원이나 한국인과의 국제결혼이 늘어난 영향도 있다.

이처럼 외국인은 일상 속에 더 가까워지는데 한국 사회의 인식 변화는 더디다. 한국행정연구원의 ‘사회통합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외국인 수용도’는 10점 기준 5.3점에 그쳤다. 조사를 시작한 2019년(5.2점)부터 비슷한 수준에 머물고 있다. 외국인 수용도란 외국인을 한국 국민으로 받아들이는 정도를 뜻한다. 0점이면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10점이면 ‘매우 동의한다’를 의미한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외국인 이민자와 노동자를 이웃·직장동료·배우자·절친한 친구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응답은 지난해 10%였다. 2019년(11.3%)에 비해 소폭 하락했지만, 2015년(8.1%)과 비교하면 오히려 올랐다.

석사 유학생인 A(26)는 “인도네시아 사람이라고 하니 ‘국내총생산(GDP)이 낮은 나라에서 한국에 왔으니까 부잣집 딸이겠다’ 같은 무례한 말을 들었다”고 했다. 영국인 엘리스 프라이스(25)는 동의 없이 사진을 찍히거나, 식당과 술집에서 입장을 거절당한 적이 있다. 그는 “한국 사회가 나를 다르고 분리된 존재로 보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차준홍 기자

차준홍 기자

앞으로 한국은 단기적으로는 인력 부족, 장기적으로는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외국인 인력의 역할이 필요하다. 저출산과 고령화로 노동력 부족이 심화하고 있어서다. 그러나 외국인을 받아들이는 한국의 포용성은 여전히 부족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설동훈(전 한국이민학회장)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외국인에 대한 한국인의 차별적 태도 가운데 일부는 ‘일자리를 빼앗긴다’는 인식에서 온다”며 “정부는 고용시장을 모니터링해 한국에 유입되는 인력을 계획하는 한편 그 필요성 등을 사회적으로 설득해 인식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짚었다.

한국의 인구구조에 맞게 다문화 교육이 달라져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건수(한국이민학회장) 강원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는 “인력이 온다는 건 결국 사람이 온다는 것이다. 외국인과 이웃으로 살 수 있도록 다양성 존중 등 시민사회의 인식이 개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교수는 또 “현재 노동·가족·교육 등으로 분절돼 있는 정책을 유기적으로 총괄하는 컨트롤타워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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