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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도 팀 이름도 없다…오케스트라 공식 깬 게릴라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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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고잉홈의 음악가들. 왼쪽부터 손열음(피아노), 조성현(플루트), 함경(오보에), 유성권(바순). 김종호 기자

고잉홈의 음악가들. 왼쪽부터 손열음(피아노), 조성현(플루트), 함경(오보에), 유성권(바순). 김종호 기자

도무지 평범하지 않은 공연이다. 우선 이들에게는 마땅한 이름이 없다. ‘○○ 오케스트라’ 혹은 ‘○○ 심포니’라 부를 수가 없다. ‘고잉홈 프로젝트’라는 간이 명칭 같은 것만 있다. 특수성이 사라질까 봐 이름을 짓지 않았단다.

연주가 시작되면 더 낯설어진다. 오케스트라 안에서 연주하던 단원이 돌연 걸어 나오거나 그 자리에서 일어나 협연자로 연주한다. 다른 연주자들과 합쳐 소리를 내던 이가 주인공으로 변신하는 장면이다. 연주가 끝나면 다시 오케스트라 속으로 들어가 합주자가 된다. 이때는 또 다른 단원이 나와 협주곡을 연주한다. 이렇게 10곡 넘게 이어진다. 지난해 여름 공연에서는 바이올리니스트 스베틀린 루세브가 오케스트라와 라벨의 치간느를 연주하고 다음 곡에서 오케스트라 대열에 합류했다. 루세브는 명문 악단인 라디오프랑스필하모닉의 악장 출신이다.

지난해 공연에서 조성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협주곡을 연주하는 모습. [사진 고잉홈 프로젝트]

지난해 공연에서 조성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협주곡을 연주하는 모습. [사진 고잉홈 프로젝트]

보통 오케스트라 공연은 이렇다. 지휘자가 입장하고 지휘자의 지휘봉에 맞춰 첫 음과 마지막 음이 울린다. 오케스트라의 짧은 서곡, 그 다음은 실력 좋은 독주자가 나와서 오케스트라와 함께 하는 협주곡, 마지막은 오케스트라의 온전한 역량을 보이는 교향곡이다.

하지만 고잉홈 프로젝트의 공연은 이 규칙을 따르지 않는다. 다음 달엔 1~3일 총 세 번 공연하는데 특히 2일 공연이 그렇다. 그리그의 오케스트라 작품 ‘심포닉 댄스’로 시작해 단원들이 차례로 나와 협주곡 13곡을 연주한 후 라벨의 오케스트라 작품 ‘볼레로’로 마무리한다. 지휘자가 없다. 협주곡은 각 10분 내외. 표준적인 오케스트라 공연에선 상상할 수 없는 프로그램이다. 한국에는 없었던 방식이다.

지휘자 없이 연주한 ‘봄의 제전’. [사진 고잉홈 프로젝트]

지휘자 없이 연주한 ‘봄의 제전’. [사진 고잉홈 프로젝트]

음악계의 게릴라와도 같은 고잉홈 프로젝트는 피아니스트 손열음, 플루티스트 조성현을 비롯해 각 악기의 실력자들이 모였다. 유성권(바순)·함경(오보에)·김두민(첼로)·김홍박(호른)·조인혁(클라리넷)은 각각 베를린·헬싱키·뒤셀도르프·오슬로·뉴욕의 오케스트라에서 현재 수석 연주자이거나 역임했던 이들이다. 올해 고잉홈에 참여하는 연주자 87명은 14개국 40개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하는 연주자들이다. 한국으로 돌아와 연주해 ‘고잉홈’이다.

“단원 하나하나가 얼마나 잘하는지 보여주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손열음은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협주곡 릴레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2021년 고잉홈 프로젝트 사단법인을 만들고 연주자들을 모아 프로그램을 구성했다. “잘하는 걸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플루티스트 조성현의 생각도 비슷하다. 그는 독일 쾰른의 귀르체니히 오케스트라 수석을 지냈고 지금은 연세대 음대 교수다. “실력 있는 단원 하나하나가 주인공이고 주인인 오케스트라다.”

조인혁의 클라리넷 협연 장면. [사진 고잉홈 프로젝트]

조인혁의 클라리넷 협연 장면. [사진 고잉홈 프로젝트]

독주자로 역량이 충분한 이들이 모여 각자 최대치를 보여주는 것이 이들의 목표다. “지휘자나 음악 감독이 없다 보니 연습할 때 의견을 정말 많이 나눈다.”(함경) 보통 자신의 악기만 표시된 파트보를 보고 연주하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고잉홈에서는 전체 악기가 한 번에 나오는 총보를 들고 연습실에 모인다. 협주곡을 정할 때도 각 연주자가 가장 하고 싶은 곡을 고른다.

단원 하나하나가 솔리스트인 악단의 소리는 ‘입체적’이다. “서로 다른 오케스트라 소속의 사람들은 연주해보면 각자 소리가 다르다. ‘여기에서 이런 소리를 왜 내지?’라는 생각이 드는데 합쳐놓고 보면 좋고, 서로 성장한다.”(유성권)

프로그램 또한 정해진 공식을 따라가는 대신 스토리를 풀어낸다. 이번 3회 공연의 종착지는 라흐마니노프 ‘심포닉 댄스’다. 고향 러시아에서 혁명으로 떠밀리듯 떠난 라흐마니노프가 미국에서 쓴 유작이다. 이 곡까지 가기 위해 첫날은 번스타인의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중 ‘심포닉 댄스’, 둘째 날은 그리그의 ‘심포닉 댄스’로 음악회를 시작한다. 여기에 첫날에는 미국 음악 그 자체인 거슈인 ‘랩소디 인 블루’, 체코 작곡가 드보르자크가 뉴욕에 머물며 쓴 ‘신세계로부터’ 교향곡을 연주한다. 작곡가들의 고향과 타향이 얽힌다. “조국을 사랑하면서도 다른 문화에 열려있던 드보르자크처럼 고잉홈 오케스트라도 그랬으면 좋겠다. 한국으로 돌아와 함께 연주하는 애국자이면서, 동시에 세계인이었으면 한다.”(손열음)

고잉홈 프로젝트의 당돌한 여정은 계속된다. 손열음은 “앞으로 더 자주 모이고 더 획기적인 일들을 하려 한다”고 했다. 고잉홈 프로젝트는 다음 달 1~3일 오후 7시 30분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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