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5분 거리를 20분 돌아가라고?"…강남 신축 '불법담장' 무슨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서 9년 간 세탁소를 운영해온 송정용(51)씨는 한 달 전 세탁물을 인근 아파트인 래미안블레스티지에 배달하러 갔다가 깜짝 놀랐다. 항상 열려있던 후문에 못 보던 철제 담장 때문이다. 송씨가 인터폰을 통해 세탁물을 배달하러 왔다고 말하자 “입주자 전용이니 방문자는 정문으로 가서 신분증을 맡기고 출입 카드를 받으라”는 안내가 돌아왔다.

송씨는 “5분이면 갈 거리를 돌아가니 차까지 밀려 20분이 걸렸다”며 “출입구를 통제하는 아파트는 이제 배달을 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별도의 외부인 출입 차단 시설이 없는 구축 아파트인 개포주공 5단지 주민 이모(40)씨는 “담장 때문에 5분이면 가던 아이들 등굣길이 두 배 넘게 걸린다”며 “생활상의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강남 신축 아파트들이 단지 밖 외부인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쌓은 철제 울타리로 인한 아파트 주민들과 이웃들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등산객 시끄러워” vs “통행 방해” 주민 갈등 

지난 20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개포동 디에이치아너힐즈 정문 출입구 보행통로에 철제 담장이 설치돼있다. 아파트 입주민 출입증을 찍어야 진입할 수 있다. 장서윤 기자

지난 20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개포동 디에이치아너힐즈 정문 출입구 보행통로에 철제 담장이 설치돼있다. 아파트 입주민 출입증을 찍어야 진입할 수 있다. 장서윤 기자

 담장 안 주민들은 “담장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지하철 수인분당선 개포동역에서 대모산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개포동 디에이치아너힐즈 아파트. 이 아파트를 도보로 통과하려면 정문 옆 좁은 길에 설치된 1.5m가량 높이의 철제 담장에 딸린 쪽문에 출입증을 찍어야 한다. 입주민 이모(72) 씨는 “여기부터 우리 아파트니까 조금은 조심해달라는 의미로, 하나의 경계를 지어놓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모산으로 향하는 등산객들은 이 아파트 주민들에겐 적이다. 입주민 박모(45)씨는 “입주 초기에는 등산객들이 아파트에 물이 흐르는 곳에서 신발을 벗고 발을 씻거나, 입주민 휴식 시설인 벤치에서 음식을 먹고 쓰레기를 치우지 않는 일이 있었다”며 “담장을 안 지을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인근 개포 래미안블레스티지도 2019년 2월 입주 이후 외부인 출입을 막지 않다가, 지난 6월말 정문을 포함한 모든 출입구를 막는 담장을 새로 설치했다. 입주민 이모(62)씨는 “지난해 강도 사건이 일어나 소동이 있었다. 열쇠를 갖고 다녀야 해서 불편하지만 아이들을 보호하는 차원에서라도 담장은 있는 게 맞다”고 말했다.

서초구 반포동도 비슷한 양상이다. 한강공원이 인접한 반포센트럴자이, 신반포자이, 아크로리버뷰신반포 등 아파트도 허가 없이 불법 담장을 설치한 것으로 서초구청은 파악하고 있다. 반포센트럴자이 주민 현모(74)씨는 “근처에 한강과 고속버스터미널이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지나간다. 자전거를 훔쳐가거나 아파트 벤치에서 노숙하는 사람들 때문에 불안하다”며 “담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반포동 신반포자이 후문 출입구에 철제 담장이 설치돼있다. 이 담장은 인근 한강공원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 위치해있다. 장서윤 기자

지난 22일 오후 서울 서초구 반포동 신반포자이 후문 출입구에 철제 담장이 설치돼있다. 이 담장은 인근 한강공원으로 향하는 길 중간에 위치해있다. 장서윤 기자

재건축 조건엔 ‘공공보행통로’…구청은 갈팡질팡

 문제는 이 담장들이 모두 불법이라는 점이다. 이 아파트들의 재건축 계획은 ‘공공보행통로’를 포함하는 개방형 아파트를 조건으로 허가를 받았다. 공공보행통로는 지구단위계획수립지침 상 아파트 입주민 외에 일반인도 보행할 수 있도록 상시 개방된 통로를 의미한다. 공공보행통로는 서울특별시가 결정하는 지구단위계획 혹은 관할구청의 사업계획승인 단계에서 조건으로 포함된다.

그러나 서울시와 관할구청은 문제 시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서울시 관계자는 “개포 디에이치아너힐즈의 경우 서울시가 정비 계획을 결정할 때는 단순 권고 사항으로, 애매하게 들어가 있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공공보행통로를 강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업계획승인권자인 구청이 직접 제재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강남구청은 “2020년 1월 디에이치아너힐즈에 시정조치 명령을 내리고 수차례 시정을 촉구했으나 위반 사항이 계속돼 같은 해 5월 재건축조합장을 경찰에 고발했다(강남구청 관계자)”고 말했다. 구청의 허가 없이 담장을 설치했다는 혐의의 대가는 재건축조합장에게 내려진 벌금 100만원이 전부였다. 3년이 지난 지금도 불법 담장은 시정되지 않고 있다. 담장 철거에 이행강제금을 부과하려면 건축법으로 제재해야 하는데, 높이 2m 미만의 담장은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울 강남구 개포동 디에이치아너힐즈 건축물대장. 해당 아파트는 2020년 5월 철제 펜스 무단 증설로 위반 건축물로 등록됐다. 건축물대장 캡처

서울 강남구 개포동 디에이치아너힐즈 건축물대장. 해당 아파트는 2020년 5월 철제 펜스 무단 증설로 위반 건축물로 등록됐다. 건축물대장 캡처

 강남구청은 지난해에도 담장을 무단으로 증설한 개포 래미안포레스트의 재건축조합장을 상대로 경찰에 고발했지만, 지난 2월 검찰 수사 단계에서 불송치 결정됐다. 경찰 관계자는 “공동주택관리법 제35조 1항의 적용 대상은 관리 주체인데, 관리 주체가 아닌 행위자를 고발해 법령 검토 미흡을 이유로 불송치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창무 한양대 도시공학과 교수는 “예전 강남을 생각하면 차와 주민들이 다녔던 골목길을 아파트라는 슈퍼 블록이 막은 것”이라며 “사적 구역에 있는 도로라도 공공 자산의 성격이 분명히 있기 때문에 규제할 수 있는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지금의 강남 지역의 가치는 고용 유발 효과와 부가가치 업종들이 지역 내에 밀집해 높은 것인데, 불법 담장은 궁극적으로 강남의 도시적 기능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래미안블레스티지 측면 출입구에 철제 담장이 설치돼있다. 해당 담장의 높이는 약 1.3m로, 2m를 넘지 않아 건축법 적용을 받지 않는다. 장서윤 기자

지난 20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래미안블레스티지 측면 출입구에 철제 담장이 설치돼있다. 해당 담장의 높이는 약 1.3m로, 2m를 넘지 않아 건축법 적용을 받지 않는다. 장서윤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