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해서 다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올해 초 어느 날 저녁, 서울의 한 식당에서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당시 보훈처장)이 함께 자리한 국무위원들에게 넌지시 이렇게 물었다. 박 장관은 지난해 보훈처장 취임 직후부터 줄곧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재평가를 공개 거론하고 있던 참이었다. 박 장관은 내심 다른 국무위원들이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대부분 참석자는 “이승만 대통령이 그동안 역사의 음지에 오래 있었다. 이제 빛을 볼 때가 됐다”며 ‘이승만 재평가’에 공감했다고 한다.
'이승만 재평가' 공감대 이룬 국무위원들
중앙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당시 식사 자리엔 박 장관을 비롯해 권영세 통일부 장관, 박진 외교부 장관,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 등이 참석했다.
특히 원희룡 장관이 가장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냈다고 한다. 원 장관은 평소 “이 전 대통령이 주도한 대한민국 건국의 역사는 긍정과 성취의 역사로 봐야 한다”고 해왔다. 원 장관은 식사 자리에서도 “이 전 대통령 실각 이후 들어선 박정희 정권 18년 동안 이 전 대통령의 공적이 많이 묻혀버렸다”며 “이 전 대통령 입장에서 아주 불행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원 장관은 박 장관에게 “객관적인 사료를 통해 이 전 대통령의 공적을 다시 확인해 알릴 필요가 있다”며 ‘스티코프의 일기’를 읽어볼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이 일기는 소련 육군 중장 테렌티 스티코프가 남긴 기록으로, 소련의 지시를 받은 북한 김일성이 이 전 대통령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방해한 과정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韓 “이승만 농지개혁, 대한민국 대전환 계기”
다른 국무위원도 거들었다고 한다. 이 전 대통령의 서울 배재고(배재학당 후신) 후배인 권영세 장관은 “이 전 대통령이 걸출한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점이 많이 아쉽다”고 말했고, ‘이승만기념사업회’ 회장을 지낸 박진 장관은 “국제정치, 국제관계에서 보인 이 전 대통령의 탁월함은 정말 그 누구도 비견할 수 없을 정도”라고 했다.
'이승만 재평가'엔 한동훈 법무부 장관도 힘을 실었다고 한다. 또다른 식사 자리에서 한 장관은 “이 전 대통령의 공을 통째로 알리면 국민이 버거워 할 수도 있다. 잘 한 것부터 조금씩 설명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을 박 장관에게 건넸다고 한다.
한 장관은 지난 15일 대한상공회의소가 주최한 제주포럼 정책강연에 참석해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을 한국 발전의 결정적 장면으로 소개했다. 한 장관은 “농지개혁으로 만석꾼의 나라였던 대한민국이 이병철, 최종현 회장 같은 영웅이 혁신을 실현할 수 있는 나라로 바뀌었다. 농지개혁이 대전환의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국가보훈부 관계자는 "윤석열 정부 들어 '이승만 재평가'가 탄력을 받을 수 있었던 데엔 이처럼 여러 국무위원이 의기투합해 힘을 실어주었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박민식 "자유민주주의 정체성 세운 이승만"
한편 19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 58주기 추모식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박민식 장관은 “자유민주주의는 우리 국가의 정체성이고, 그 정체성을 세운 분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라며 “이승만 대통령 바로 세우기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굳건히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빈농과 소작농이 절대 다수였던 시대, 문맹률이 무려 90%였던 시대에 이승만은 ‘농지개혁’과 ‘의무교육’을 도입해 획기적인 ‘국민의 시대’를 열었다”며 “우리 서민들의 물질적인 토대와 정신적인 토대의 기초를 마련한 것이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탄생 초기부터 자유 진영의 일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이날 추모식은 사단법인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가 주관했다. 이 전 대통령의 양자인 이인수 박사를 비롯해 각계 인사 500여명도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