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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의 시선

권영준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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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영준 대법관이 19일 서울 대법원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뉴스1

권영준 대법관이 19일 서울 대법원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 뉴스1

고액 법률의견서 논란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쉽게 재석 265명 중 찬성 215명으로 국회의 임명동의안을 통과한 권영준 신임 대법관(53)은 한국 주류층의 핵심인 서오남(서울대 출신 50대 남성) 중에서도 특히 손꼽히는 엘리트다. 서울법대 4학년 재학 중 사법시험에 수석 합격했고, 1999년 서울지법 판사로 임관한 후 법원 내 최고 엘리트 코스인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 판사를 거쳐 2006년 서울법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판사 재직 시 국비로 하버드 로스쿨 석사(LLM)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학자로서의 학문적 성과도 탁월하다. 단행본 20여권(공저 포함)을 냈는데, 대한민국 학술원 우수학술도서(2021)로 선정된 『민법학의 기본원리』처럼 쟁점을 논리적으로 풀어내면서도 독자가 이해하기 쉽게 서술해 호평받은 책이 많다. 그런가 하면 우수한 교수법으로 강의하는 교수에게 주는 서울대 학술연구교육상(2022)을 받을 정도로 교육자로서의 자질도 뛰어나다.

능력·사생활 모두 평판 좋지만
김앤장 10억 등 거액 받은 건 문제
전관예우 넘어 후관예우 우려 커

공식 프로필만큼 비공식적 삶의 모습도 남다르다. 법관 시절 명사 음악회에서 모차르트 바이올린 협주곡 제5번의 협연자로 무대에 설 정도로 뛰어난 연주 실력을 갖추고 있다. 음악 전공자인 모친의 피를 물려받아 피아노·클라리넷도 수준급이란다. 운동도 잘해서, 서울대 총장 배 테니스대회 우승 경력도 있다. 이게 전부가 아니다. 학창 시절 교수인 부친을 따라 미국 유타주에 머문 덕분인지 영어는 원어민 수준이고, 도쿄대 특임교수 시절엔 일본어로 강의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보통 사람은 범접조차 어려운 천재, 또는 수재다. 사생활 면에서의 흠도 없다.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 귀감이 되는 4남매의 아버지인데, 본인이 쓴 책 서문마다 치과의사인 아내와 네 자녀 이름을 꼬박꼬박 언급할 만큼 가정적이다.

권영준 신임 대법관은 대학 4학년 시절 사시에 수석 합격했다. 지난 1993년 사시 수석한 후 가족과 함께 언론 인터뷰를 했다. [KBS 뉴스 캡처]

권영준 신임 대법관은 대학 4학년 시절 사시에 수석 합격했다. 지난 1993년 사시 수석한 후 가족과 함께 언론 인터뷰를 했다. [KBS 뉴스 캡처]

이쯤 되면 '완벽'이라는 단어도 그를 묘사하기에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진작부터 법조계 안팎에서 "권영준이 대법관 되는 건 시간 문제"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그런 그가 자칫 국회 임명동의안을 넘지 못하고 불명예 하차할 뻔했다.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시절인 지난 2018~2022년 5년 동안 김앤장 등 대형 로펌 7곳이 맡은 사건 38건과 관련해 63건의 법률의견서를 써주고 무려 18억원 넘는 보수를 받은 게 문제가 됐다. 특히 김앤장 한곳으로부터만 30건에 9억5000만원을 받았다. 많게는 1건에 5000만원, 평균 3000만원이 넘는다. 불법이 아니고 "학자적 소신에 따라 기존의 학문적 견해를 표명했을 뿐"이라지만 국민 눈높이에서 볼 때 특정 로펌으로부터 매해 교수 연봉(1억2000만원)을 훌쩍 뛰어넘는 대가를 챙긴 건 분명 상식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난관이 예상되던 임명동의안은 예상과 달리 쉽게 통과됐다. 여당뿐 아니라 야당까지 진보 성향도 아닌 그에게 찬성표를 던진 덕분이다. 명분은 그가 의견서로 벌어들인 소득상당액을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입장을 밝힌 데다 의견서 일부를 국회가 열람할 수 있도록 동의했다는 것인데, 평소 더불어민주당 행태로 볼 때 이례적이다. 대법관이라는 자리는 공정성에 대한 신뢰가 매우 중요하고, 그러기에 가혹하리만큼 투명하게 검증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그는 청문회에 앞서 단 1건의 의견서만 스스로 공개했다. 엄격하게 비밀유지를 해야 하는 국제중재 건 이외에 다수의 국내 재판 관련 의견서도 공개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야당은 찬성표를 던졌다.

권영준 대법관이 2018년 한 민사소송 피고 대리인인 대형로펌 의뢰로 작성한 의견서. 자료 민형배 의원실

권영준 대법관이 2018년 한 민사소송 피고 대리인인 대형로펌 의뢰로 작성한 의견서. 자료 민형배 의원실

이러니 국민 사이에서 법조 카르텔 이야기가 나온다. 21대 국회도 20대와 마찬가지로 법조인 출신 비율이 15%나 된다. 권 대법관과 대학을 같이 다녔던 한 변호사는 "낙마하면 국민적 손해"라고 했고, 국제중재 건으로 그에게 정부 측 의견서를 여러 차례 받았던 또 다른 변호사는 "한국법을 잘 모르는 외국 중재인에게 영어로 설득력 있게 의견서를 쓸 수 있는 매우 드문 인재라 일이 몰렸던 것"이라며 "돈 욕심은커녕 술 안 마시고 골프 안 치는 성직자 같은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법조계 내부에서의 이런 좋은 평판이 이심전심 국회의 찬성표에 영향을 끼쳤겠지만 법조계가 아닌 다른 분야 전문가였다면 아무리 훌륭한 인물이었다 해도 진행 과정이 사뭇 달랐을 것이다.

국회의 동업자 봐주기나 향후 권 대법관이 맡을 재판의 신뢰도도 물론 문제다. 하지만 법조계의 고질적 병폐인 전관예우를 넘어 '후관예우'가 고착화할 수 있다는 점이 더 우려스럽다. 정형근 경희대 로스쿨 객원교수는 페이스북에 "대형로펌은 향후 대법관 임명 가능성이 있는 인물을 상대로 의견서를 의뢰해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려 할 것"이라며 "전형적인 이권 카르텔"이라고 비판했다. 권 대법관이 아무리 뛰어난 인물이라지만 반박하기 어렵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