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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 와인 아껴 마신다"…가난해진 유럽, GDP도 美 절반

중앙일보

입력

지난 5월 독일 베를린 한 교회의 배급소에서 사람들이 카드에 식료품을 싣고 나오는 모습. AP=연합뉴스

지난 5월 독일 베를린 한 교회의 배급소에서 사람들이 카드에 식료품을 싣고 나오는 모습. AP=연합뉴스

유럽인들이 가난해지고 있다는 진단이 나왔다. 임금은 그대로인데 물가는 가파르게 오르면서다. 여기에 고령화와 수출 부진 등 성장을 둔화하는 구조적 요인이 겹치면서, 유럽 경제가 미국에 크게 뒤처질 전망이다.

17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유럽이 올해 초부터 경기 침체에 접어들었다며, 이는 수십 년간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경제적 현실이라고 보도했다. WSJ은 “프랑스인들이 푸아그라와 적포도주를 덜 먹고, 스페인 사람들은 올리브 오일을 아끼고 있다”고 전했다. 유럽인들이 일상적으로 하던 소비에서조차 허리띠를 졸라매고 있다는 얘기다.

이는 수십 년에 걸친 고령화로 소비와 생산성 향상이 부진한 가운데 유럽 물가가 급등했기 때문이다. 높아진 물가에 비해 임금은 오르지 않으면서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떨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인플레이션을 반영한 실질 임금은 2019년 이후 유럽 각국에서 하락했다. 독일에서 약 3%,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각각 3.5%, 그리스는 6% 추락했다. 같은 기간 미국의 실질 임금이 6%가량 높아진 것과 대조적이다.

얇아진 지갑에 타격을 받는 건 중산층도 마찬가지다. 명품 기업인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 등은 유럽 내 매출 비중이 줄고 있다. 고물가에 식자재 지출도 감소했다. 지난해 독일의 1인당 육류 소비량(52㎏)은 전년보다 약 8% 줄면서 관련 집계를 시작한 1989년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채식주의자가 늘어난 영향도 있지만, 육류 가격이 최근 몇 달 동안 30% 상승한 영향으로 풀이된다. 독일 연방 농업 정보센터에 따르면 독일인들은 소고기와 송아지보다 가격이 저렴한 닭고기 등 가금류 소비를 늘리고 있다.

벨기에서 일하는 한 간호사는 “(인플레이션 때문에) 모든 비용을 지불하려면 거의 부업을 해야 할 정도”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유럽에선 소매점과 식당의 재고를 비교적 싼 값에 판매하는 투굿투고(Too Good To Go)가 인기를 끌고 있다. 현재 유럽 전역에 7600만명의 이용자가 있는데, 이는 2020년 말보다 약 3배 많다.

더 큰 문제는 구매력 하락 → 내수 침체 → 실업 등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우려된다는 점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인근의 유기농 식품 공급업체인 토마스 울프는 고물가 여파로 지난해 매출이 30% 가까이 감소했다. 이에 코로나19 팬데믹 초기에 고용한 33명의 직원을 모두 해고했다.

유로존의 수출 역시 부진한 상황이다. 물가 상승률이 미국 등 다른 국가보다 높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에너지 가격이 치솟으면서 유로존 생산품의 가격 경쟁력이 국제 시장에서 떨어진 탓이다. 코로나19 이후로 중국을 비롯한 세계 경제의 회복도 더뎌 유로존의 수출이 늘어날 여력도 부족하다. 유로존은 국내총생산(GDP)의 약 50%를 수출에 의존하기 때문에 외부 경제 환경에 취약하다는 평이다. 내수 비중이 큰 미국은 수출이 GDP의 약 10%를 차지한다.

유로존과 미국 경제의 격차가 앞으로 더 크게 벌어질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유럽국제정치경제센터는 최근 보고서에서 “현재 추세라면 2035년에는 미국과 유로존의 1인당 GDP 격차가 오늘날 일본과 에콰도르의 격차만큼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유로존의 GDP는 올해 15조700억 달러로 추산돼 미국(26조8600억 달러)의 약 절반 규모다. 2008년만 해도 유로존과 미국 GDP는 각각 14조2200억 달러, 14조7700억 달러로 비등했다. 유로존 경제가 지난 15년간 달러 환산기준 약 6% 성장할 때 미국은 82%나 성장했다. 달러 강세를 고려하더라도 두 지역 간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는 분석이다.

유럽 경제가 침체 늪을 빠져나오기엔 앞으로 상황도 녹록지 않다고 WSJ은 전망했다. ‘끈적한 인플레이션’으로 임금 상승 압력이 여전히 강한 데다가, 복지와 국방비 지출을 감당하기 위한 증세 압력도 커지고 있다는 진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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