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김영민의 생각의 공화국

자아를 찾아 떠난다고? 딱딱하게 굳은 ‘나’부터 돌아보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여행을 떠나는 당신의 이유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1925년, 이광수는 ‘잊음의 나라로’라는 글에서 떠나는 청년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아아 조선아! 조선에 있는 모든 사람아 모든 물건아! 하나도 남지 않고 죄다 내 기억에서 스러지어 버려라! (…) 나는 잊어버릴 양으로, 오직 모든 것을 잊어버릴 양으로, 그리하고 다시는 다시는 아주 기억도 아니 가질 양으로 특별히 산과 나물과나 짐승과나 벌레와 이 세상에 무슨 물건과나 정이 들지 아니할 양으로 잊음의 나라, 허무의 나라를 찾아가는 것이라고 오직 이렇게만 알라.”

 전염병 이후 다시 떠나는 여행
타 문화권과의 경계 느끼게 돼

너무나 열심히 살아온 한국인
일단 ‘사회의 표준’서 벗어나라

사람과 섞이고, 바람을 느끼고…
보다 유연해진 자신 만날 수도

100년 전 이광수 “죄다 잊어라”

생각의 공화국

생각의 공화국

오늘날 해외여행을 떠나는 한국인 마음에는 저처럼 지독한 허무와 환멸은 아마 없을 것이다. 지금은 식민통치 하의 1920년대가 아니라 한국문화가 세계 곳곳에서 인기를 끄는 21세기다. 꽤 잘살게 된 나라의 국민으로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여행 같은 것은 대다수의 현대 한국인에게 익숙하지 않다. 이제 한국인은 다른 종류의 여행을 꿈꾼다.

어떤 사람들은 자아를 찾아 여행을 떠난다. 내가 누군지 도대체 모르겠다, 살아갈 방향을 잃었다, 같은 느낌이 엄습할 때 사람들은 해외로 가곤 한다. 그런데 이것은 사춘기 청소년이나, 위기의 중년에게나 어울리는 일이 아닐까. 시도 때도 없이 자아를 찾아 떠나겠다고 하면, 비웃음을 살지 모른다. 자아, 그거 지겹지도 않냐. 나한테 자아 많은데, 하나 줄까? 저기 공항의 분실물 센터 구석에 네가 잃어버린 자아가 있다더라, 거기 한번 가봐라. 국제공항에는 자아 판매점이 있다더라, 고급품으로 하나 사 와라.

그런데 여행을 통해 자아를 찾는다는 게 아주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타 문화권에 들어가게 되면, 환경과 자신과의 경계가 새삼 분명하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어디까지가 자연스러운 부분이고 어디부터가 부자연스러운 부분인지가 새로이 인식되는 것이다. 그렇게 경계를 새삼 의식하는 감각을 일러 자아를 찾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이상의 자아라는 것은 어쩌면 환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혹은, 자아를 찾아야겠다는 그 열망 자체가 자아일지도 모른다.

인도, 자아의 국제 유실물 센터

그런 열망 자체가 버겁고 지겨워서 떠날 수도 있다. 즉, 자아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아를 잊기 위해서 떠날 수 있다. 무아(無我) 사상이 인도에서 나왔다며? 마치 식민지 시기 서구인처럼 인도를 찾아가 보는 거다. 아뿔싸! 자아를 집에 두고 왔어야지! 자아는 집요하게 여행자를 따라 다닌다. 막상 인도에 도착해보면, 인도는 세계 곳곳의 잃어버린 자아들이 모인 국제적 유실물 센터다. 자아를 잊을 수 있는 것은 낯선 사람들 속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비슷한 사람들 속에서가 아닐까. 자아를 진짜 잃어버리면 잃어버렸다는 느낌조차 없을 것 같다. 자아를 잊고 싶다는 말은, 사실 타인의 간섭에 시달리는 자신을 잊고 싶다는 말은 아닐까.

그런데 여행을 통해 자아를 잊는다는 게 아주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환경 속에서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다 보면, 그 전과는 다른 자신이 튀어나오곤 한다. 즉 익숙했던 환경에서 작동하던 자신의 익숙한 면모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낯선 환경에서 자신의 새로운 면모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새로운 자신을 감각하는 동안 과거의 자신의 모습을 잊게 될 수 있다. 그 과정을 일러 자아를 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닐까.

재충전에 깃든 방전의 일상화

사실 먹고 살기 바쁜 사람 입장에서는 자아를 잊건 찾건, 다 한가한 소리로 들릴 것이다. 이광수가 살던 20세기 초와는 달리 21세기 한국에는 쉬지 않고 돌려야 할 가계와 국가 경제가 있다. 한국인은 잠시 여행을 떠날 수 있을지언정 영영 떠날 수는 없다. 조만간 일터로 돌아가야 한다. 즉 대다수 한국인을 위해 준비된 여행은 방랑 그 자체를 위한 낭만적 여행이 아니라, 재충전을 위한 여행이다.

재충전이라. 재충전이라는 비유에 이미 한국인의 삶이 담겨 있다. 자신을 배터리로 간주하는 마음의 습관이 담겨 있다. 이 정신 없이 돌아가는 사회 속에서 한국인은 충전과 방전을 거듭하는 배터리다. 일회용 배터리냐, 충전용 배터리냐의 차이는 있어도, 결국 배터리다. “잘 재충전하고 오게”라는 덕담 안에는, “돌아오면 열나게 일을 해야 할 테니까”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너나 할 것 없이 충전과 방전을 거듭하다가 결국에는 폐전지 쓰레기통으로 갈 운명이다. 각자 제공한 전기를 통해 한국 사회는 돌아간다. 돌아가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돌아간다. 외국에 나와서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한국인들이 정말, 열심히, 그것도 너무 열심히 산다는 사실이다.

여행은 막대한 체력 필요한 일

그렇게 열심히 사는 인간들에게 자아를 찾는 여행이란 너무 태평하게 들릴지 모른다. 한국인은 자아를 찾아 떠나기 이전에 에너지를 찾아 떠나야 하니까. 한국 사회 내에 머물러 있으면 일단 방전의 위험이 너무 크다. 한국은 너무 간섭이 심한 사회, 표준을 지나치게 강제하는 사회, 남의 신경을 써야 하는 사회가 아니던가. 떠남으로써 그런 일에서 생기는 에너지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다.

에너지 손실 최소화를 넘어, 여행 자체가 에너지 자체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하기에, 여행은 너무 막대한 체력을 요하는 일이다. 미술관 구경만 해도 지친다. 자신은 가만히 앉아 있고, 명화들이 돌아가면서 눈앞을 지나가 주는 서비스는 없다. 눈에 불을 켜고 직접 돌아다녀야 한다.

마냥 편하기를 원한다면, 애초에 여행을 떠나지 말아야 할지도 모른다. 패키지 여행은 어떠냐고? 그것도 나름이지만, 너무 편한 여행은 자칫 여행의 참맛을 앗아갈 수 있다. 그리고 특정 시간 내에 최대 효과를 누리려는 효율의 지옥으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울 수 있다.

새로운 삶의 방식에 마음 열어야

여건이 된다면, 상당한 불편함을 감수하는 여행을 떠나보는 거다. 수동적으로 서비스를 기대하는 태도로는 누릴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가상 체험이 발달한 요즘이지만, 직접 답사할 때 얻을 수 있는 체험은 여전히 질적으로 다르다. 잘만 하면, 오랜 고정 관념이 흔들리게 될지 모른다.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마음을 열게 될지 모른다. 마음이 유연해질지 모른다. 남다른 호기심으로 대상을 바라보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매사가 재미있어질지 모른다. 그러다 보면, 오랜 꿈이 하나 이루어질지 모른다.

오랜 꿈이라니, 그렇게 말하니 마치 꼭 되고 싶었던 어떤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아니, 그런 것은 없다. 그런 게 있으면 인생이 답답할 것 같다. 에너지와 시간을 그 목표에 다 때려 넣고, 그 목표 달성에 인생의 의미를 두는 삶, 좀 답답하지 않을까. 운이 없어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열패감이 들고, 운이 좋아 그 목표를 달성해도 만족감은 짧겠지. 따라서 꼭 되고 싶은 것은 없다.

꼭 되고 싶은 것은 없어도, 되고 싶지 않은 것은 있다. 그중 하나가 완고한 사람이다. 가능하면 그건 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런 사람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답답해 보였기에. 그러나 완고한 사람인들 완고함이 좋아 완고해졌겠는가. 차츰 완고해졌을 테고, 완고해진 다음에는 자신이 완고해졌다는 것조차 느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완고해지고 나면 사람들은 직언을 해주지 않는다.

인류학적 체험 제공하는 여행

보통 사람도 직언을 들으면 기분이 상하기 쉬운데, 완고한 사람은 오죽하랴. 적개심을 드러내거나 앙심을 품을지 모른다. 완고하다는 지적을 받을 기회가 없으니, 더욱 완고해질 것이다. 완고에 완고를 거듭하여 완고를 완성하리라. 통풍이 안 되는 완고한 마음의 감옥에 갇혀 살다 끝내 완고한 주검이 되리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 매사가 그렇듯이, 완고함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는 완벽한 방법 같은 것은 없을 거다. 그나마 완고함을 완화해주거나 늦추어 줄 몇몇 방안이 있을 뿐. 그중 하나가 여행이 아닐까. 제반 여건이 충족된다는 전제하에 말한다면, 자신이 사는 사회로부터 멀리 떠나보는 여행이 좋을 것 같다. 물론 모든 해외여행이 다 완고함을 완화해주지는 않는다. 외국에 가서 명승지를 둘러보고 온다고 사람이 유연해질 리야. 그 정도로 완고해지지 않을 수 있다면, 완고함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마냥 안온한 인큐베이터 속 여행이 아니라 인류학적 체험을 제공하는 여행을 꿈꾼다. 유명한 건축물이나 명승지를 구경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해당 공간을 잘 누려보는 거다. 사람들과 섞여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저녁 바람이 살갗을 어떻게 건드리는지 느껴보는 거다. 폐허 속에 서 있는 거대한 나무를 조용히 안아보는 거다. 오래된 성벽에 비친 말간 빛을 응시하는 거다. 운이 좋으면, 바로 그 순간 유연하게 자아를 찾기도 하고, 자유롭게 자아를 잊기도 하고, 새롭게 자아를 창조하기도 할지도 모른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