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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인간 된 피해자 대신 후견인이 낸 탄원서…대법 "효력 없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김명수 대법원장이 1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전원 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고 있다. 뉴스1

김명수 대법원장이 17일 서울 서초구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전원 합의체 선고를 위해 자리에 앉고 있다. 뉴스1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피해자의 성년 후견인이 가해자와 금전적으로 합의해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의사 표시를 했어도,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다는 판단을 대법원이 재확인했다. 교통사고 처리 특례법상 운전자가 실수로 사람을 다치게 한 혐의(치상)는 피해자가 원치 않으면 죄를 묻지 않는 반의사 불벌죄에 해당하는데, 일부 법률행위를 대리할 수 있는 후견인은 처벌을 원치않는다는 의사를 대신 표현할 수는 없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17일 교통사고처리 특례법 위반(치상)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금고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A씨는 2018년 11월께 성남시 분당구에서 자전거로 B씨를 들이받아 뇌 손상 등 중상해를 입힌 혐의로 기소됐다. 이 사고로 B씨는 2019년 6월 의사 표현이 불가능한 식물인간 상태라는 판정을 받았다. 이후 배우자 C씨는 법원으로부터 장애‧질병 등으로 제약을 받는 사람을 대신하는 성년후견인으로 인정받았다. 성년 후견 제도는 치매, 지적 장애 등 정신적 제약으로 사무처리 능력이 지속적으로 결여된 성인에게 법원이 일부 법률행위를 대리할 수 있는 후견인을 지정하는 제도다.

1심 선고가 나기 전 C씨는 A씨에게 4000만원을 받고 합의했고, 법원에 A씨의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처벌불원서를 제출했다. A씨는 성년후견인인 C씨가 B씨를 대신해 처불 불원 의사를 밝혔다는 이유로 공소기각을 주장했다. A씨가 받는 교통사고특례법위반상 치상 혐의는 반의사불벌죄에 해당한다.

그러나 1심은 A씨에게 금고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A씨는 “처벌불원서에도 유죄 판결한 1심에 문제가 있다”며 항소했지만 2심의 결론도 같았다.

대법원 전경. 뉴스1

대법원 전경. 뉴스1

 대법원도 하급심 판단이 옳다고 봤다. 재판의 핵심 쟁점은 반의사불벌죄의 경우 의사 표현이 불가능한 피해자를 대신해 성년후견인이 처벌 불원 의사를 결정할 수 있는지였다. 재판부는 “교통사고처리 특례법이나 형법, 형사소송법은 반의사불벌죄의 경우 피해자의 처벌불원 의사에 관한 대리를 허용하는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며 “따라서 반의사불벌죄의 처벌불원 의사는 원칙적으로 대리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봤다.

이어 “반의사불벌죄는 피해자의 일방적 의사표시만으로 이미 개시된 국가의 형사사법 절차가 중단된다는 면에서 처벌불원 의사는 피해자의 진실한 의사에 기한 것이어야 한다”며 “피해자가 의사능력이 없는 상태라고 해서 성년후견인의 대리에 의한 처벌불원 의사표시는 피해자의 진실한 의사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형사소송법은 성년후견인 등 법정대리인이 소송을 대리할 수 있는 경우를 제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피고인 또는 피의자가 의사능력이 없는 때 그 법정대리인이 소송행위를 대리할 수 있고(형사소송법 26조) ▶피해자가 사망한 때에는 배우자나 직계친족도 고소권을 행사할 수 있다(형사소송법 제225조). 그러나 대법원은 이런 조항이 성년후견인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 피해자의 처벌불원 의사를 대리할 수는 있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본 것이다.

다만 반대로 박정화·민유숙·이동원·이흥구·오경미 대법관은 소수의견을 내고 “의사무능력자인 피해자를 위해 처벌불원 의사표시를 대리할 수 있다는 명시적인 규정이 없지만 이를 금지하는 규정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며 “오히려 형사소송법 26조를 법률 흠결상태에 있는 피해자가 의사 무능력인 경우에 유추적용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봤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대법원 다수 의견은, 성년후견인이 제출한 처벌불원서는 양형 과정에서 참작될 요소일 수는 있겠지만 공소기각 사유로 보기엔 지나치다는 의미”라며 “만약 반의사불벌죄에서 성년후견인의 처벌 불원 의사 표현을 대리할 수 있다고 인정하면 치매 등 의사능력이 결여된 당사자를 대신해 가족이 금전적으로 합의해버리는 등의 악용될 여지도 적잖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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