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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에버라드 칼럼

식량난에 눈감은 북한 지도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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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유엔 산하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북한의 식량난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중국과 러시아의 식량 원조 규모가 넉넉하지 않아 한국 정보 당국이 지난 3월 추산한 식량 부족분 80만t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해 보인다. 북한 매체도 식량 보급의 어려움을 인정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식량 배급이 불공평하게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얼마 남지 않은 평양 주재 외국인들의 전언에 따르면 평양엔 기아 사태가 없지만, 북한 동북 지방에는 기아로 인한 사망자가 있다고 한다. 심각한 인도주의적 재난이다. 경제 문제를 다룬 지난 6월 28~29일의 제8차 전원회의와 지난 5일의 내각 전원회의를 보면 북한 정권이 눈앞의 식량난을 우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북 지방에 사망자 발생 보고
비료공장과 물 관리 개선 시급
저장창고·정미소도 현대화해야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kim.jeeyoon@joongang.co.kr

그렇다면 해법이 있을까. 장기적으로 유일한 해법은 식량 증산으로 이어지는 자유시장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독립적인 상인 계층의 등장을 두려워하는 북한 정권은 이를 주저한다. 2021년 북한 정권은 당국의 곡물 독점을 위해 장마당을 축소했고, 당국이 운영하는 곡물 상점을 다시 열었다. 산이 많아 경작지가 부족한 북한의 지형적 특성도 문제다. 중국과 러시아를 설득해 식량을 더 많이 지원하도록 할 재주도 없어 보인다. 유일한 희망은 세계식량계획(WFP) 인력의 재입국을 허용해 국제사회의 식량 원조를 다시 받는 것이다.

필자가 볼 때 식량난을 정치적·실질적으로 타개할 방법은 다음 네 가지다. 첫째, 비료 공장 확충이다. 옛 소련 붕괴로 석유에 의존하는 비료 산업은 더는 저렴한 석유를 우방국에서 수입할 수 없게 됐다. 비료가 부족하자 곡물 생산량이 곤두박질치면서 식량난으로 이어졌다. 북한에서 가장 큰 흥남비료와 남흥화학, 그리고 최근 문을 연 순천인비료공장의 경우 석탄이나 석회석을 연료로 사용해 돌아가지만, 여전히 효율적 가동이 어렵다. 식량난 해소를 위해 이 공장들을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

둘째, 물 관리다. 잦은 홍수와 가뭄은 흉작으로 이어진다. 북한에서 추방된 외국의 물 공학자들은 북한이 자신들만의 방식을 고집한다고 지적한다. 북한이 국제적으로 입증된 물 관리 방법을 무시한다는 비판이다. 북한이 기준 이하의 재료로 둑을 만들어 수압이 높아지면 둑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구조로 만들었다고 한탄했다. 어느 물 공학자는 현대의 북한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물 관리 능력이 훨씬 뛰어났다고 전했다.

셋째, 식량 저장 현대화가 필요하다. 낡고 비효율적인 저장 시설에서 많은 곡물이 해충과 곰팡이에 썩어간다. 북한의 한 가정주부는 “처음에는 쥐들이 먹고 그다음에 병사들이 먹고 그다음에야 우리가 먹는다”고 필자에게 말했다. 넷째, 정미소의 현대화가 필요하다. 북한 정미소는 매우 열악해 수확한 벼와 겉겨를 제대로 정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쌀은 요리하기 어렵고 영양소가 충분하지 않다.

이런 문제 중에 하나만 개선해도 상황은 어느 정도 호전될 것이다. 이들 중 어떤 것도 정치적 논쟁거리가 될 수 없다. 비용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니다. 미사일 외피 개발보다 정미소 건설이 훨씬 싸고 수월할 것이다.

그런데도 왜 북한 정권은 식량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고 있는가. 아마도 북한 정권이 어떠한 외세의 영향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 아닐까. 북한 주민은 한국식 말투를 쓰거나 ‘무분별하게’ 옷을 입으면 비난받는다. 이런 환경에서 어떤 군 간부도 외국의 물 관리나 곡물 저장 모델을 도입하자고 나서기 어렵다.

가장 큰 문제는 지도부의 관심 부재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올해 들어 농업은 차치하고 그 어떤 경제 시설도 방문하지 않았다. 지난달에 있었던 전원회의에서 경제적 문제가 다뤄졌지만 김 위원장은 그 회의에서 발언하지 않았다. 이는 당 간부들에게 매우 부정적인 신호를 준다.

새로운 무기를 만든 간부는 칭찬받지만, 식량 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한 군 간부는 언급조차 되지 않기 때문이다. 최고 지도자가 어디에 관심이 있는지, 어디에 관심이 없는지 간부들은 너무 잘 안다. 식량난에도 김 위원장은 지금 무기 프로그램에만 혈안이 돼 있다. 북한이 겪고 있는 많은 비극 중 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