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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윤병세의 한반도평화워치

디커플링에서 디리스킹으로…공급망 생태계 변화 대비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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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

지난 5월 일본 히로시마 G7 정상회담 선언에서 디리스킹(de-risking, 위험 감소·완화)이 미국과 서방의 대중국 전략 경쟁의 핵심 원칙으로 공식화되었다. “디커플링(decoupling·분리)이 아닌 디리스킹과 다변화(diversifying)에 기초하여 경제 탄력성과 경제안보를 위한 구체적 조치를 조율해 나가기로 합의”하고 공급망 분야에서 과도한 중국 의존을 줄여나가기로 한 것이다.

또 이를 전후하여 미국과 유럽연합(EU) 고위 인사들은 공개 연설과 연쇄적 중국 방문을 통해 중국 측에 이러한 방침을 명확히 전달하였다. 디커플링을 우려하던 많은 국가도 일단 안도하고 있다. 미·중간에 구체적인 돌파구가 마련되려면 많은 난관이 예상됨에도 디리스킹 합의는 정책적 함의가 크다.

미, 중 분리 대신 다변화 전략
공급망 교란에 취약한 한국
외교·경제·기술 통합 대응을
중국과도 고위급 소통 넓혀야

미국, 미·중 사이 선택 강요하지 않아

지난 5월 19~21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참가국 정상들. [AFP=연합뉴스]

지난 5월 19~21일 일본 히로시마에서 열린 주요 7개국(G7) 정상회담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참가국 정상들. [AFP=연합뉴스]

첫째, 디리스킹 원칙과 대중국 연대 요소(elements), 경제안보 별도 성명 발표는 향후 대중국 접근의 방향성과 기준을 제시하고 투명성을 제고했다. 서방 진영 내부적으로 경제안보 분야의 범위를 두고 나타난 강경론과 온건론 간의 불협화음을 극복하고 공동 지침을 마련한 것이다. “중국과 솔직하게 관여하는 것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국익에 따라 행동한다”고 하여 관여 수준에 대한 각국의 편차 가능성은 열어 두었다.

둘째, 디리스킹의 공식 정의는 없지만 미국의 입장이 보다 명확해졌다. 토니 블링컨 국무부 장관과 재닛 옐런 재무부 장관은 최근 방중 일정과 연설 등에서 ‘국가안보를 위한 제한적인 표적 조치(narrowly scoped, targeted controls)’임을 명백히 밝혔으며, 다른 나라들이 미·중 어느 편에 서도록 강제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도 지난 4월 브루킹스연구소 연설을 통해 “디리스킹은 근본적으로 탄력적이고 효율적인 공급망을 확보해 어느 국가의 강압에 종속될 수 없도록 보장한다는 의미”라고 정의했다. G7 정상회담 선언에 국가안보를 위한 첨단 기술 보호조치가 무역과 투자를 과도하게 제한하지 않도록 할 필요성이 포함된 것도 의미가 있다.

셋째, 서방과 중국 간 공동 이해 분야로서 거시경제·보건·기후변화 등 글로벌 과제가 협력 분야로 개괄적으로라도 제시된 것은 경쟁이 충돌로 비화하지 않도록 가능한 분야별 협력을 통해 ‘안전 방책’(guardrail)을 수립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주었다.

넷째, 무엇보다도 디리스킹으로의 전환을 전후하여 중국과의 고위급 의사소통이 활성화되었다. 블링컨 장관 및 옐런 장관 등의 방중, 국가안보와 정보 책임자 회담 등에 이어 친강 외교부장의 방미도 예상됨에 따라 미·중 정상회담이 가시권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러한 고위급 교류는 서방의 대중국 전략 틀 속에서 소통 강화를 위한 전술적 조정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미국으로서는 ‘전략경쟁의 책임 있는 관리’ 입장과 내년 11월 대선 등에 비추어 고위급 대화 활성화가 유리하다고 볼 것이다.

중국도 미·중 관계 안정화 필요

중국은 디리스킹 합의에 대해 “디리스킹이 위장된 디커플링이고 미국의 전략적 목표는 여전히 중국 봉쇄”라고 비판한다. 지난 6월 리창 중국 총리는 독일 연설에서 “디리스킹이 실질적인 디커플링 조치와 차별적 행동으로 이어진다면 시장경제 원칙과 WTO 규정 위반”이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지난달 블링컨 장관 방중 결과를 포함하여 중국의 반응은 신중하지만 부정적이지는 않다. ‘양국관계 안정화’를 위해 소통을 강화하고 이익 공유 분야에서의 협력이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시진핑 3기 체제에서 경제 성장 동력을 유지해야 할 중국으로서도 나쁠 것이 없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긍정적 상황 전개는 우리에게도 전략적 공간을 약간 넓혀 줄 수 있으므로 적극적이며 통합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 첫째, 디리스킹과 공급망 다변화에 호응하여 새로운 공급망 생태계 형성에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최근 국가미래전략원 보고서는 특정국에 의한 공급망 교란으로 피해 취약성 면에서 한국은 세계 1위라고 한다. 5월 말 타결된 인도·태평양 경제 프레임워크(IPEF) 공급망 협정, 최근 베트남·인도·호주 등과의 협력 강화는 공급망 다변화에 기여하고 경제적 상호의존의 무기화를 약화하는 장치가 될 것이다.

둘째, ‘탄력성있는 공급망’에 관한 G7의 6대 핵심 원칙과 일부 예시 이외에 디리스킹이 구체적으로 정의되지 않아 향후 이행 과정에서 예상되는 불확실성에 대비해야 한다. 국가 안보, 첨단 기술과 전략물자의 범위, 수출 통제와 제재 기준, WTO 규정과의 정합성 등이 포함된다. 주요국들의 경제안보 정책과 입법 동향을 주목해야 한다.

디리스킹은 한국에 도전이자 기회

셋째, 미국·EU·일본·호주처럼 외교안보, 경제와 산업, 과학기술 등이 연계 통합된 국가전략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부문별 전략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첨단기술이 안보와 경제를 주도하는 시대에 ‘제2의 스푸트니크 모멘트’나 ‘AI·양자 모멘트’(후발 국가의 기술 추격에 따른 충격)가 와서는 안 된다는 미국의 절박감은 통합 전략과 민관 협력의 중요성을 방증한다.

넷째, 미·중·EU 간 고위급 의사소통이 활성화하는데 맞춰 중국에 대한 당당한 외교 입장을 유지하면서 고위급 소통과 공통 이해 분야를 확대하는 게 필요하다. 돌발 악재가 없다면 오는 9월 G20 또는 11월 APEC 정상회의 계기에 미·중 정상회담이 개최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과 EU 정상 간의 회담도 열릴 것이다. 한·중·일 정상회의 의장국으로서 리창 총리와 회담을 갖고, 다자 정상회의 계기에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도 모색할 수 있다. 다음 달 열릴 것으로 보이는 워싱턴 한·미·일 정상회담은 조율된 접근을 위한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G7 정상들의 디리스킹 합의로 미·중 전략경쟁의 장기화라는 시대 전환 속에서 기회의 창이 살짝 열리고 있다. 아직은 깨지기 쉽고 향후 외교안보 분야로까지 확산할지 낙관하기는 너무 이르다. 정상회의 등 다양한 계기를 활용하면서 민관이 팀 코리아로 뭉쳐 국익을 극대화해야 한다.

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