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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창극 칼럼] 祭物없는 제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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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대선자금은 정치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들에게 돈을 준 기업인, 그리고 정치인으로부터 돈을 받은 유권자, 이렇게 3박자가 맞아 돌아갔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지금 논란의 초점은 정치인에게로만 모아져 있다. 과연 정치인만 잘못했는가. 기업인들은 참으로 뻔뻔하다. 그들이 왜 정치인들에게 그 많은 돈을 주었는가. 협박 때문에? 보험을 드는 심정으로? 물론 그런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이었는가? 기업인 스스로가 잘 알 것이다. 켕기는 일을 저질러 왔기 때문에 소금 먹은 사람이 물 켠다고 돈을 갖다준 것은 아닌가? 나중에 한 건 하여 쉽게 돈을 벌려고 한 것은 아닌가? 전경련이 10년도 안 되는 세월에 다섯번씩이나 사과성명을 냈는데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누가 믿겠는가. 그들은 이번에도 "정치개혁을 하지 않으면 더 이상 정치자금을 내지 않겠다"고 했다. 멍에를 정치인에게만 씌우려 하고 있다.

*** 정치인-기업인-유권자 3박자

국민은 정치자금에서 자유로운가? 이 시점에도 돈을 못 모았거나, 자기 돈도 없는 국회의원들은 걱정이 태산이다. "5개월 뒤면 선거를 치러야 하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어떻게 돈을 만들까"로 초조하다. 선거 하면 으레 후보가 돈을 쓰는 것으로 알고 있는 유권자들이 과연 몇 개월 사이에 제 돈 내고 후보자를 미는 선진국형 유권자로 바뀌겠느냐는 것이다. 그 국민은 지금 모여 앉으면 정치인 욕하기에 바쁘다. 모두 도둑놈이라고….

정치인들은 어떤가. 나보다 상대방이 더 더럽다는 말밖에는 할 줄 모른다. 검찰에 전면 수사케 하자는 대통령의 말도 "너희가 우리보다 더 받았으니 더 부도덕하다"고 몰아 세울 계략은 아닌가. 그러고 고작 나오는 말들이 일괄고백 후 사면하자고 한다. 돼지저금통으로 선거를 치른다고 그렇게 국민을 속이고, 나는 대쪽이니 더러운 돈 안 만진다고 믿게 해 놓고 지금 와서 들통이 나니 '고백 후 사면'이라고? 이렇게 뻔뻔해도 되는가. 누구도 책임은 안 지면서 "잘못된 관행이니 사면하고 넘어가자"고 한다면 과연 그 버릇이 고쳐질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미래가 비관적인 것이다.

나쁜 습관을 끊으려면 그 끊는 아픔이 있어야 한다. 고통 없이 나쁜 습관은 결코 고칠 수 없다. 희생이 필요한 것이다. 그 희생을 지켜 보면서 사람들은 잘못을 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참회가 나오고, 새 결심이 잉태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회창씨의 사과 발표는 미흡했다. "감옥에 가더라도 내가 가야 마땅하다"고는 했지만 정말 희생양이 될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학(鶴) 같은 삶을 살기 원했는데 진흙탕 정치판에 뛰어 들어 남은 것은 참담함뿐"일지 모른다. 그는 명예도, 가족도 잃었다. 다시 재기할 수 있는 기회도 없어 보인다.

재정위원장 방에 돈을 박스째로 재워놓고 선거를 치렀는데 이를 후보가 몰랐다면 누가 믿겠는가. 설령 몰랐다면 모른 것이 아니라 모르는 척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위선적인 행동이었다고 비난해도 할 말이 없다"고 고백했는지 모른다. 당 재정국장이 무슨 잘못이 있는가. 당료로서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이다. 청와대 총무비서관이 무슨 큰 잘못이 있겠는가. 그 역시 盧대통령을 위해 일했을 뿐이다. 지금 구속된 사람들이 국회의원인가, 후보자인가? 힘있는 자는 모두 빠지고, 아랫사람들만 희생시킨 후 "고백 후 사면하자"면 설득력이 있겠는가.

*** 이회창씨 감옥가기 자청했다면

이회창씨는 이랬어야 한다. "SK가 돈을 가지고 온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세풍(稅風)도 사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선거 때 대략 얼마를 썼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저 모르는 척했을 뿐입니다. 그들에게는 죄가 없습니다. 내가 그 책임자입니다. 나는 내일 검찰로 자진 출두하여 대선자금에 대해 나의 아는 모든 것을 밝히겠습니다. 그리고 ('감옥에 들어가더라도'가 아니라)감옥으로 들어가겠습니다. 그 대신 다른 사람들은 풀어 주십시오."

그가 정말로 감옥으로 걸어간다면 뻔뻔스러운 정치인들도 부끄러워할 것이다. 기업인들도, 국민도 뒤를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잘못된 관습도 이런 희생을 통해 치유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이회창씨는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선거는 졌지만 역사에서는 승리하는 것이다.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

문창극 논설위원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