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병든 사회 낳는 정치적 불의/김주연(시평)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많은 사람들이 오늘의 우리 사회를 병든 사회라고 진단하고 있다. 각종 흉악범과 청소년범죄를 포함한 범죄의 만연현상과 치안부재는 국가의 존재이유에 대한 질문으로까지 나타나고 있으며 이를 척결해야 할 사직기관의 기강해이 문제도 심각하게 제기되는 형편에 이르고 있다.
공무원을 비롯한 공직자들의 공공의식 미비에 따른 부정·부패,탐욕적 이기심에만 매달린 온갖 부도덕은 아예 불감증의 수준을 넘어선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다. 요컨대 어른·아이 할것없이,또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것없이,그야말로 남녀노소 구분없이 어디 성한 사람이 몇 명 있는가 할 정도의 병든 모습으로 이 사회의 환부가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극에 달한 공직자 비리
병든 사회에서는 차라리 같이 병든 모습으로 있는 것이 정직하다는 어느 지식인의 독백도 있지만 그같은 반어적·지적 논리를 즐길 만큼 이미 한가하지 않다는 것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의 느낌일 것이다.
그러나 보다 심각한 것은 이 병든 사회에 대처하는 우리 사회 자체의 대응자세다.
한 개인에게 있어서도 병은 병 그 자체보다 병에 대응하는 환자의 자세가 더 중요한 것으로 인식된다. 예컨대 병이 있는 줄 모르고 지나친다는지,병이 있는 줄 알면서도 진단과 투약을 게을리한다든지,돌팔이 진단으로 병을 더 키워간다든지 한다면 그것들은 모두 치료와는 거리가 먼 행위일 것이다.
병원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이에 따른 장·단기 요법을 숙지한 다음 성실하게 그 치료과정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 조치가 아니겠는가.
병든 사회의 치유도 같은 논리의 적용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사회구성원 모두 이러한 논리를 철저히 터득하고 그 이행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할 때,한 개인에게 올 수 있는 비극은 한 사회에 있어 더욱 무서운 파국으로 나아가지 않는다는 방벽이 없다.
병든 우리 사회 치유에 있어서 가장 경계해야 될 적은 공연히 수선만 떠는 비합리적인 각종 캠페인이다. 올바르게 살자느니,청소년을 선도하자느니,국민운동을 벌여야 한다느니,범죄와 전쟁을 해야 한다느니,향락·퇴폐문화를 추방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벌여대는 온갖 모임·선전 등이 거대한 이 환자를 더욱 피곤하게 한다.
환부의 깊은 부분에 자리잡고 있는 병원체는 사실상 그 정체가 드러난 것으로서,이제 필요한 것은 용기있게 그것을 제거하는 수술을 단행하는 일이며,그로 인한 고통을 사회구성원 모두가 인내와 관용으로 감내하는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병원체는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누적되어온 정치적 불의다.
오늘 우리 사회의 질병을 고치기 위해 가장 먼저 행해져야 할 일은 정치적 정의의 회복이며,그러기 위해서는 정당을 포함한 정치인·정치집단의 각성이 뼈아프게 이루어져야 한다. 표현의 과장이 조금 허용된다면 정치인들만 반성하면 병든 사회는 눈에 띄게 건강해질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그들 때문에 이 사회는 지금 이렇다.
○정치인 뼈아픈 각성을
부드럽게 표현해 권위주의라는 말로 일컬어져온 지난 시대의 정치적 불의는 첫째,우리의 자녀를 인간답게 키우는 일에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고 그 일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보여준 것은 다만 불의와 폭력이었기에 다음 세대 역시 그 유산을 확대 재생산하고 있을 뿐이다. 흉보면서 배운다고 하지 않는가.
정치적 폭력과 불의는 둘째,나라를 맡아 국민을 위해 일해야 할 공직자들의 공덕심과 명예를 죽여버림으로써 큰 권력이든 작은 권력이든 그것을 사적 욕망의 도구로 떨어뜨리는 국가감의 결핍현상을 초래했다. 잡혀야 할 폭력배와 잡아야 할 공무원이 함께 앉아 술마시고 노는 상태에 이르렀건만 그것을 추상같이 바로잡아야 할 국가의 권위와 체통은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 아닌가.
정치적 불의는 셋째,바로 그 정치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획득하지 못하기 때문에 표면상 안정스러워 보일 경우라 하더라도 한 사회는 근본적·내재적 질서를 갖지 못한다. 쉽게 말해 무질서가 판을 치게 마련이다. 무질서는 행정체계까지 연결되며,그 결과 각종 정부사업들도 이 범주를 벗어나기 힘들게 된다.
이랬다 저랬다하는 관료들의 식언,기술개발 부진으로 애로를 겪고 있는 수출,농촌사업 구조개편의 지지부진,퇴폐·향락산업의 번창 등도 무질서한 행정체계의 한 소산이라는 점도 겸허하게 인정되어야 한다.
사람도 일생을 살면서 병들 수 있듯이 한 사회도 긴 역사의 도정에서 병들 수 있다. 따라서 지나친 절망이나 좌절은 바람직하지 않다. 올바른 진단과 올바른 처방,올바른 치유과정을 받아들인다면 보다 건강한 사회로 물론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권위주의 청산이 우선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이러한 분석과 합리주의,이를 위해 필요한 자기쇄신을 단행하는 정치인들의 각성이다.
정치인과 정치집단은 행여 「우리 모두가 반성해야 한다」는 식의 호도를 계속하거나 도덕적인 재무장을 해야 한다는 투로 초점을 흐려서는 안 된다. 치유에는 순서가 있으며,이 순서가 바뀔 때 치유는 오히려 난맥을 드러낼 수 있다.
권력의 왜곡에서 비롯된 우리 사회의 질병은 정치인과 권력기관이 바로섬으로써 그 치유의 실마리가 풀려질 것이다. 이행기에 있어서 너무 성급하게 병이 낫기를 서두르는 것도 경계하는 한편,문제의 핵심을 보는 눈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권위주의의 온전한 청산이 올바른 권위를 세울 것이며,사회의 참된 질서를 가져올 것이다.<숙대 교수·문학평론>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