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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마구 때린 前보디빌더 영장도 기각…"피해자 안전 어쩌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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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지방법원은 지난 11일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은 30대 여성을 무차별 폭행한 전직 보디빌더 A(38)씨에 대해 검찰이 청구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법원은 “피의자의 주거·직업·가족관계와 증거수집 현황 등을 보면, 도주나 증거인멸 우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기각 사유를 밝혔다.

올해 5월 인천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전직 보디빌더가 주차 시비 끝에 30대 여성을 폭행했다. 사진 JTBC 뉴스 캡처

올해 5월 인천의 한 아파트 주차장에서 전직 보디빌더가 주차 시비 끝에 30대 여성을 폭행했다. 사진 JTBC 뉴스 캡처

하지만 검찰은 “법원이 사안을 포괄적으로 고려하지 않고, 지나치게 형식 논리 위주로 판단했다”는 입장이다. 검찰 관계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지내고 있고, 최근 무차별 폭행에 대한 경각심이 높아지는 상황에서 법원이 사안의 중대성보다 도주·증거인멸 가능성만 본 것 같다”고 말했다. 법원이 내놓은 기각 사유처럼 ‘주거·직업·가족관계를 보니 도주·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고 하면 소외계층만 구속되는 거냐는 볼멘 소리도 나온다.

“사안의 중대성 고려해야” vs “불구속 수사가 원칙”

영장 발부 여부를 둘러싼 법원과 검찰의 갈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최근 사안이 중대하고, 피해자에게 위해를 가할 우려가 있는데도 영장이 기각되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 나온다. 

올 초 인천에선 여자친구를 흉기로 찌른 20대 남성에 대한 구속영장이 “주거가 일정하고 범죄 전력이 없다”는 이유로 기각된 일도 있었다. 남성과 피해 여성은 같은 오피스텔에 살고 있었다. 영장이 기각되면서 경찰이 순찰을 강화하는 것 외에 달리 여성을 보호할 방도가 없었다.

지난해 4월 창원지검 진주지청은 결혼을 반대하는 예비 시어머니를 청산염으로 살해한 예비 며느리 A씨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지만 기각됐다. “증거인멸과 도주 우려가 없다”는 이유였다. 경북 지역의 한 법원은 올해 4월 7살 어린이의 집에 침입해 강간을 시도한 사건에서 “피의자가 범행을 자백했고, 도망의 염려가 낮다”며 두 차례나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서울 서초동 대법원 전경. 뉴스1

서울 서초동 대법원 전경. 뉴스1

형사소송법은 ▶죄를 범했다고 의심할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고 ▶일정한 주거가 없는 때 ▶증거를 인멸할 염려가 있는 때 ▶도망하거나 도망할 염려가 있는 때 ▶범죄의 중대성과 피해자에 대한 위해 우려 등을 고려해, 피고인을 구속할 수 있다고 돼 있다.

법원은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불구속 수사가 우선이고, 구속영장 발부는 예외적으로 해야한다는 입장이다. 법원 관계자는 “전체적으로 구속 기소의 비율도 낮아지고 있다”며 “6개월 구속 기간 안에 1심이 끝나지 못하고 피고인이 보석으로 풀리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처음부터 불구속 상태로 충분한 방어권을 보장하면서 재판을 운영할 필요성도 제기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검찰은 그런 방침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법원의 영장 판단이 탁상공론이란 입장이다. 불구속 기준이 모호하고, 영장전담 판사들이 기계적인 판단을 하면서 사안의 현실적인 엄중함을 제대로 읽지못한다는 얘기다.

대장동 민간 개발업자들을 돕는 대가로 금품을 수수했다는 이른바 '50억 클럽' 의혹을 받는 박영수 전 특별검사가 지난달 30일 오전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경기도 의왕 서울구치소에서 나오고 있다.

대장동 민간 개발업자들을 돕는 대가로 금품을 수수했다는 이른바 '50억 클럽' 의혹을 받는 박영수 전 특별검사가 지난달 30일 오전 구속영장이 기각되자 경기도 의왕 서울구치소에서 나오고 있다.

서울남부지법은 지난 11일 증권사 애널리스트가 자기가 산 주식에 대해 추천 리포트를 쓰고 주가가 오르자 팔아 시세차익을 거둔 사건에서도 “혐의 내용이 중하지만, 도주와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라임 사태’ 주범 김봉현씨의 탈옥 계획을 도운 김씨의 친누나 영장도 기각됐다. 검찰은 김씨가 누나를 통해 외부 조력자에게 돈을 건넨 증거 등을 제출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상당 부분 증거가 수집됐고, 수사기관에 협조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검찰은 최근 ‘대장동 50억 클럽’ 사건에서 개발사업을 돕는 대가로 금품을 수수한 혐의를 받는 박영수 전 특별검사의 영장이 기각되자 “다수 관련자들의 진술과 이를 뒷받침하는 객관적 증거들에 의하면, 청탁의 대가로 금품을 수수·약속한 점이 충분히 인정되는 상황에서 법원의 영장 기각 사유를 납득하기 어렵다”며 항의하기도 했다.

그래픽=신재민 기자

그래픽=신재민 기자

서울 지역의 한 부장검사는 “수사를 잘하면 ‘상당한 증거가 확보돼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고 기각하고, 증거가 부족하면 ‘다툼의 여지가 있다’고 기각한다”고 말했다. 법원이 말하는 불구속 수사 원칙이라는 게 일관적이지 않다는 얘기다. 대검 관계자는 “영장 기각에 대해 상급심에서 다시 판단을 받아볼 수 있는 ‘영장항고제’ 도입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며 “예측 가능한 기준이나 판례가 형성되면 혼란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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