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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두식의 이코노믹스

미·중의 공급망 무기화로 전 세계 경제 피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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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세계 경제 뒤흔드는 ‘안보 과잉’

김두식 테크앤트레이드 연구원 상임대표·변호사

김두식 테크앤트레이드 연구원 상임대표·변호사

미·중 패권경쟁이 끝없는 ‘안보 게임’으로 번지고 있다. 미국은 중국의 기술패권을 저지하는 것이 국가안보 문제라 하고, 중국은 중국대로 국가안보를 내세워 미국에 맞서고 있다. 최근 재닛 옐런 미 재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해 고위 인사들과 대화를 나눴지만, 미·중 관계에 뚜렷한 돌파구를 만들진 못한 것으로 보인다. 두 초강대국이 벌이는 안보 경쟁은 세계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국가안보가 경제에 우선하면서 지난 수십년간 전 세계 번영을 가져온 다자간 무역체제는 존립의 위기를 맞고 있다.

양강 경쟁 ‘안보 게임’으로 변질
미, 대중 경쟁 승리가 안보 핵심
중, 반간첩법 앞세워 공세 나서

GATT, 예외조항 엄격히 제한
제재로 상대 굴복시키긴 어려워

미 “WTO가 중국 불공정 막지 못해”

이코노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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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문제를 국가안보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 때부터라 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2018년 무역확장법 232조에 근거해 유럽연합·중국·인도·캐나다 등에서 수입되는 철강과 알루미늄이 미국의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이유로 11~25%의 관세를 부과했다. 세계무역기구(WTO) 분쟁절차에서 미국은 자신의 관세부과가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제21조에서 허용하는 ‘안보 조치’에 해당하며, 안보 조치는 아예 WTO 심사대상도 될 수 없다고 항변했다. WTO 패널은 미국 주장을 기각했다. 그런데도 미국은 관세 부과 철회를 거부했다.

바이든 행정부 들어 국가안보는 중국을 견제하는 기본 논리로 사용되고 있다. 미국은 중국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국가안보의 핵심이라고 본다. WTO가 추구해온 자유무역체제는 중국의 정부 주도적 경제운용과 막대한 산업보조금 지급, 기술탈취 등 불공정 행위를 막는 데 실패한 제도라고 규정했다.

WTO 다자 규범에 구애받지 않고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뜻이다. 작년 10월 중국에 대한 첨단 반도체 및 반도체 제조 장비 수출 금지 등 미국이 취한 대(對)중국 압박조치들이 모두 국가안보의 이름으로 행해졌다.

중, 대외관계법·반(反)간첩법 반격

중국도 국가안보를 내세워 거칠게 반격하고 있다. 중국은 2021년 미국의 제재에 동참하는 국가나 개인에 대해 ‘맞불 제재’를 취할 수 있도록 하는 반(反)외국제재법을 제정한 바 있다. 그러나 최근 더욱 강력한 대외관계법을 발표했다. 7월 1일부터 시행하는 대외관계법은 외국의 제재 조치가 없더라도 중국의 주권, 안보, 발전 이익을 해치는 국가에 대해서 포괄적인 대응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했다.

대외관계법 6조는 “국가기관과 무장역량, 각 정당과 인민단체, 기업과 사업조직, 기타 사회조직 및 공민(국민)은 대외 교류협력에서 국가의 주권, 안전, 존엄성, 명예, 이익을 수호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고 명시했다. 제33조에서는 “국제법과 국제관계의 기본준칙을 위반하고 중국의 주권, 안보 및 발전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해 상응하는 반격 및 제한 조치를 취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한다. 이제 중국에 국가안보는 단순히 소극적 방어 논리가 아니라, 적극적 공격 논리가 된 것이다.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중국의 강화된 국가안보는 반(反)간첩법에도 녹아 있다. 대외관계법과 같은 날 시행된 이 법은 안보를 명분으로 내부 통제를 대폭 강화하고 있다. ‘간첩 행위’에 ‘기밀 정보 및 국가안보와 이익에 관한 문건·데이터 등에 대한 정탐, 취득, 매수, 불법 제공’을 추가했고, 형법상 ‘간첩죄’로 처벌할 수 없는 경미한 행위에 대해서도 행정구류와 같은 처벌을 할 수 있게 했다.

문제는 이 법에서 말하는 ‘안보’나 ‘국익’과 관련 있는 정보의 범위가 매우 넓고 불확정적이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중국 내 외국인이나 외국인과 교류하는 중국인들은 통상적인 거래나 활동에서 이루어지는 정보 수집 또는 제공에 대해서도 ‘간첩 행위’로 처벌받을 수 있음을 걱정해야 할 처지가 됐다.

이와 같은 중국의 입법은 앞으로 미국과 미국에 동조하는 국가 혹은 기업에 대한 중국의 제재나 ‘경제적 강압’이 이전보다 혹독해지고 다양해질 것을 예고한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은 과거 한국과의 사드(THAAD: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갈등에 따른 한한령(限韓令)이나 호주에 대한 석탄 수입 중단에서 보듯, 외국에 대해 무역제재와 같은 공식적인 압박수단과 함께 대중의 상품 불매운동이나 관광 여행 제한 같은 비공식적 압박조치들을 사용해 왔다. 〈그래프 참조〉

중, 마이크론 구매 중단 등 경제보복

종전까지 중국의 경제적 압박조치는 중국이 필요로 하는 첨단 제조업은 건드리지 않고 주로 소비재 혹은 유통기업을 타깃으로 했다. 그러나 이제 제조업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4월 중국 당국은 미국 반도체 회사 마이크론을 상대로 전격적으로 사이버 보안 조사를 단행하고, 마이크론 제품에 대한 사실상의 구매중단 조처를 했다. 마이크론은 2007년 시안에 최초 반도체 공장을 건설하고 중국 전역에서 3000명의 인력을 고용하고 있는 기업인데도 제재를 당한 것이다. 이는 미국의 대중국 기술봉쇄 조치에 대응한 중국의 경제 보복이 분야를 가리지 않고 전방위로 확대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지난 3월과 4월에는 중국 내에서 활동하는 기업 컨설팅 회사 베인앤드컴퍼니와 민츠그룹이 불시에 보안조사를 받았다. 그뿐 아니라, 일반 외국기업이 중국 데이터 관련법에 따른 데이터 보안기준을 따르지 않거나 심사를 받지 않으면 자칫 간첩죄로 처벌될 수 있는 상황이다. 중국은 데이터의 국외 이동도 국가안보 문제로 본다.

GATT는 ‘안보 예외’ 제한적으로 인정

최근 상황은 미·중 경쟁이 ‘안보 과잉’으로 치닫고 있음을 보여준다. 2차 세계대전을 겪은 후 무역자유화를 통해 세계 평화를 유지하자는 의도에서 탄생한 GATT가 염려하고 경계했던 현상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GATT는 특정 국가나 외국기업 또는 외국상품에 대한 차별 금지, 일방적인 수출입 제한 금지 등을 회원국의 기본의무로 규정했다.

다만 예외적으로 일정한 ‘안보 이익’의 보호를 위해서는 무역제한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했다. 제21조에서 각 회원국은 ‘핵분열 물질이나, 무기 운반 또는 군사기지에 대한 물자 보급과 관련하여, 혹은 전쟁 또는 국제관계에서의 긴급한 시기에, 본질적인 안보이익의 보호를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이것이 이른바 ‘안보 예외’다.

그러나 안보 예외가 남용되면 자유무역체제가 유지될 수 없기에 안보 조치의 남용을 어떻게 방지할 것인지가 GATT 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 중 하나였다. 제21조 안보 예외 조항의 문구를 제안한 미국의 협상대표 중 한 명인 레디(Leddy)는 “이 조항을 너무 엄격하게 만들면 오로지 안보 목적으로 취하는 무역제한 조치도 금지될 수 있지만, 너무 넓게 만들면 사실상 상업적 목적으로 취하는 조치를 안보 조치로 포장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즉 안보 조치는 ‘본질적인 안보 이익’의 보호를 위해서만 취할 수 있고, 상업적 목적으로 남용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였다.

오늘날은 민간 기술이 군사 기술로 전용될 수 있고, 경제 문제라 하더라도 국가안보에 직결되는 것이 있을 수 있어, 국가안보의 범위가 예전보다 넓어질 수는 있다. 또한 미국과 중국이 취하는 다양한 안보 조치 중에는 WTO 협정의 규율대상을 벗어난 것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미국과 중국이 상대를 공격하고 압박하기 위해 취하는 조치들은 총체적으로 다자무역체제를 부정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중국의 희토류 수출 통제 여파

중국이 지난 3일 반도체 및 전자제품을 생산하는 데 사용되는 갈륨과 게르마늄 수출을 통제하겠다고 발표하면서 미·중 대립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고 있다. 이건 미국의 첨단 반도체 수출통제에 맞서 중국도 본격적으로 공급망을 무기로 사용하겠다는 신호다. 대외관계법과 반간첩법 시행과 함께 중국이 미국과의 ‘총성 없는 전쟁’을 피하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전포고라 할 수 있다. 미국은 갈륨과 게르마늄을 거의 전적으로 중국에 의존하고 있다. 반도체 강국 한국도 비슷한 처지다. 이처럼 미국과 중국이 서로 상대의 목줄을 쥐고 있는 공급망을 무기로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로 인한 피해는 미·중을 넘어 전 세계에 미칠 수밖에 없다.

미·중의 경제적·군사적 덩치에 비추어 본다면 제재를 통해 상대를 굴복시키기는 어렵다. 도리어 제재가 제재를 부르는 악순환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중국에 편중한 공급망 위험을 분산하기 위한 각국의 공급망 재편 노력은 당연하고 정당하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안보’의 이름으로 상대국 또는 그 기업을 직접 제재하거나 목줄을 죄는 행위는 그것이 GATT 제21조가 말하는 ‘본질적 안보이익’을 위한 것이 아닌 한, 자제해야 할 것이다. GATT 제21조 안보 조치는 자유무역체제에 기반을 둔 세계 경제를 무너뜨리지 않는 선에서만 허용된다는 점을 미국과 중국은 잊지 말아야 한다.

김두식 테크앤트레이드 연구원 상임대표ㆍ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