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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준호의 사이언스&

의대 광풍 속 싹트는 변화…차세대 먹거리 찾는 의사 창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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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최준호 기자 중앙일보 과학ㆍ미래 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 논설위원

최준호 과학&미래 전문기자, 논설위원

‘서울대 신입생 225명, 의·치대 도전하려 입학하자마자 휴학’,  ‘학원가에 초등 의대반 등장’,  ‘전국 의대 한 바퀴 돌고 서울대 공대’…. 해가 갈수록 거세지는 ‘의대 광풍’을 묘사한 기사 제목들이다. 의대 선호 현상이 ‘망국병’(亡國病)으로까지 불리는 건 최고의 두뇌들에 거는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1인당 GDP 3만 달러의 나라’로 들어선 건 전자공학과 물리학이 최선두에 달리던 지난 세기의 청년들 덕분이었다. 지금의 의대 광풍이 계속 된다면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사람들은 누구일까. 그러잖아도 0.81, 세계 최저의 출산율인데….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한국 사회의 미래가 밝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컵의 물이 차면 넘치는 법. 의사 사회에서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개업보다 창업으로 더 큰 보람”
경희대 등 의사창업연구 바람
창업 의사들 네트워크도 활발

진료 마친 의사들, 창업연구회로

김영옥 기자

김영옥 기자

“저는 요즘 시리즈A 투자를 받으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투자금 10억원을 받으려면, 100억~200억원의 기업가치가 나와야 합니다.”

지난달 29일 오후 5시 서울 회기동 경희의료원 암센터 6층 국제회의실에 ‘흰 가운의 대표’들이 모였다. 모임의 이름은 ‘의사창업연구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서 주관하는 산학연 클러스터(협력단지)인 서울홍릉강소특구가 후원하는 경희대 의료인들의 ‘창업연구’ 모임이다.

연구회는 2021년 12월 발족했다. 창업을 꿈꾸거나 이미 창업한 교수들의 정보 교환 등이 목적이다. 회원은 경희의료원과 강동경희대병원 의사 겸 교수들이다. 매달 한 차례, 진료시간이 끝날 즈음인 오후 5시에 모여 창업 관련 강의를 듣고 토론한다. 이날의 주제는 ‘투자유치를 위한 기술가치 밸류업 전략’. 창업컨설팅 전문가인 이정희 디지털사이언스 대표가 강의하고, 의사들이 묻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경희대 의사창업연구회 회장인 이상호 강동경희대병원 신장내과 교수는 “회원이 30명 정도 되지만 대학병원 임상교수 업무 특성상 진료와 수술로 전부 한 자리에 모이기는 어렵다”며 “가급적 많이 참석할 수 있도록 요일을 바꿔가며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회원들의 관심도가 높아 매달 지속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창업 3년차 스타트업 케이바이오헬스케어의 대표다. 지난해 10월 출시한 건강관리앱 ‘리터러시M’이 주력 상품이다. 리터러시M은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을 이용해 환자 스스로 건강을 관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플랫폼이다. 앱을 내려받고 정보를 연결하면 건강보험공단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저장된 개인의 약물복용 이력, 10년치 공단검진 결과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또 이를 토대로 올바른 투약 정보와 환자 맞춤형 건강 정보까지 받을 수 있다.

“치료론 한계…직접 문제 해결하겠다”

의사창업연구회

의사창업연구회

이길연 경희대 암병원 진료센터장은 디지털 헬스케어 서비스 ‘로디(ROTHY)’를 개발·운영하는 스타트업 지아이비타의 창업자 겸 대표다. 로디는 개인 맞춤형 헬스케어 앱이다. 스마트워치를 통해 수집된 개인 정보를 인공지능(AI)이 분석해 사용자가 고쳐야 할 생활습관을 알려 준다. 지난해 초 45억원 규모의 시리즈A 투자를 성공적으로 유치했고, 삼성전자·이동통신회사 등과 협업하고 있다.

이 센터장은 경희대 의사창업연구회의 최고참이다. 2018년 창업해 올해로 5년차다. 그는 “기존의 치료만으론 한계가 있어 직접 디지털 헬스케어 시스템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다”며 “이미 회사 경영이 궤도에 올랐지만, 연구회에 도움을 주기 위해 매번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김윤나 경희대한방병원 한방신경정신과 교수는 예비 창업자다. 그는 “기존의 연구과제 수행만으론 연구의 결과물을 실제 환자에 적용하는데 한계가 있어, 직접 창업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아직 언제 창업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연구회 모임을 통해서 창업에 필요한 세세한 정보를 들을 수 있어 도움이 많이 된다”고 말했다. 이날 연구회에는 2020년 비침습 항암 의료기기를 개발하는 아이비엠솔을 창업한 권병수 경희의료원 산부인과 교수, 지난달 막 스타트업을 창업한 강경중 경희의료원 정형외과 교수, 신약 개발 스타트업 KH뉴로바이오를 운영 중인 조성훈 경희대한방병원 신경정신과 과장 등도 참석했다.

의대 곳곳에 번져가는 창업연구회

경희대와 함께 서울홍릉강소특구에 속하는 고려대에도 지난해 8월 ‘고려대학교의료원 창업연구회’가 생겨났다. 회장을 맡은 이상헌 고대안암병원 재활의학과 교수는 “요즘은 개업하는 것보다 연구를 열심히 해서 창업하면 훨씬 더 크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의사들이 많아졌다”며 “최고 엘리트라 불리는 사람들이 의대로 몰리는데, 이런 곳에서 기업이 생겨나고 차세대 먹거리가 나와야 우리나라가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고려대 의대의 대표적 창업스타다. 고대안암병원 연구부원장을 하면서 구축한 병원정보시스템 프로젝트 경험을 바탕으로 2019년 병원들이 필요한 정보와 프로그램을 클라우드로 연결해주는 스타트업 휴니버스글로벌을 설립했다. 최근까지 투자만 120억원 이상 받았고, 직원은 94명에 달한다. 이 교수는 “올 한 해 예상 매출이 100억원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의사창업 바람은 타 대학으로도 번져갈 조짐이다. 홍릉강소특구에 따르면 경희대와 고려대가 올 하반기 내 서울대와 이화여대 병원과 함께 의사창업 네트워킹 조직을 출범할 예정이다. 또 이와 별도로 전국 조직인 한국의사창업연구회도 지난해 발족했다.

임환 홍릉강소특구 단장은 “다양한 임상경험이 축적된 의사들의 기술 창업은 의료분야를 넘어 생명공학 전반의 문제 해결과 혁신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며 “더 많은 의료 인력이 연구와 협업을 통해 창업 같은 새로운 부가가치 창출에 나설 수 있도록 제도적 유인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