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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주의 아트&디자인

정상화, 바보스러움으로 도달한 경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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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은주 기자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요즘 아무리 사진 기술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미술 작품을 책으로 접하는 것과 전시장에서 실물을 직접 보는 것 사이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심지어 사진 작품도 그렇고, 그림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국내 단색화가 정상화(91) 화백의 그림은 여기서 한술 더 뜹니다. 직접 보는 경우라 하더라도, 작품과의 거리에 따라 ‘반전(反轉)’의 묘미가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전시장에 들어서며 처음 보았을 땐 단 하나의 색으로 그린 것으로 보였다가,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의 그림은 전혀 예기치 못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캔버스 표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격자무늬, 작은 네모꼴 하나하나를 가르는 밭고랑 같은 선들이 꿈틀거립니다. 보는 이를 감탄하게 하고, 또 ‘아이고, 이 지독한 사람(화가)!’이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게 하는 그림입니다.

정상화, 무제, 1974, 종이에 흑연, 프로타주, 186 x 94.5 cm. [사진 갤러리현대]

정상화, 무제, 1974, 종이에 흑연, 프로타주, 186 x 94.5 cm. [사진 갤러리현대]

 정상화, 과정 5, 2017, 캔버스에 아크릴릭, 카올린, 130.3 x 97 cm. [갤러리현대]

정상화, 과정 5, 2017, 캔버스에 아크릴릭, 카올린, 130.3 x 97 cm. [갤러리현대]

정상화, 무제, 1987, 한지에 콜라주, 94x65㎝. [사진 갤러리현대]

정상화, 무제, 1987, 한지에 콜라주, 94x65㎝. [사진 갤러리현대]

정 화백은 이우환·박서보 등과 더불어 한국 단색조 추상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인데요, 그는 ‘들어내고 메우기’라는 특유의 기법으로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먼저 캔버스에 붓으로 고령토를 바르고, 표면이 마른 뒤에 캔버스를 상하좌우로 접고, 고령토를 일부 들어내고 그 자리에 다시 아크릴 물감으로 메우는 방법으로 작품을 완성합니다. 그런데 이 작업을 한 번만 하는 게 아닙니다. 바르고, 말리고, 접고, 뜯어내고, 메우고, 다시 뜯어내고, 또 메우고···. 얼핏 단색 그림으로 보이지만, 색상과 질감의 미묘한 차이를 품은 디테일의 세계. 이게 그 지독한 반복 노동의 흔적이었던 것입니다.

2021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열었을 때 그는 이를 가리켜 “평면에 나만의 방법으로 공간을 만드는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화면에 요철이 생기며 평면이 입체적 공간으로 확장해간다. 이 공간성이 내겐 매우 중요했다”고 설명했습니다. 남들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차이에 매달려 작업을 지속해온 화가는 어느새 아흔 살이 넘었습니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자기만 가지고 있는 게 나온다. 근데 그것은 스스로 느끼는 것이지 남이 아는 게 아니다.” “끝없이 행위를 반복하는 그 바보스러움이 결국에 말을 해준다.” 한 달 전 서울 삼청동 갤러리현대 개인전 ‘무한한 숨결’ 개막을 앞두고 만났을 때 그가 들려준 말이 계속 머리에 맴돌고 있습니다.

남들은 몰라도 내가 안다. 이 얼마나 무서운 말입니까. 우직한 그에겐 남들 눈에 평평한 캔버스도 평생 실험하고 도전하며 파고들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오는 16일 막 내리는 ‘무한의 숨결’과 더불어 그 옆 현대화랑 기획전 ‘조선백자 제기의 미와 현대미술의 만남’에서 백자와 어우러진 모습으로 볼 수 있습니다. 한 작가의 지독한 바보스러움이 도달한 경지를 만나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