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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스타네" 희귀질환 아이들, 활짝 웃게 만든 사진작가 정체

중앙일보

입력

희귀 질환자들의 사진을 찍은 릭 귀도티 작가가 7일 오후 서울대병원에서 진행된 '희귀질환 포토 프로젝트'에서 촬영을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희귀 질환자들의 사진을 찍은 릭 귀도티 작가가 7일 오후 서울대병원에서 진행된 '희귀질환 포토 프로젝트'에서 촬영을 하고 있다. 장진영 기자

“세상에, 신나서 사진 찍더라고요. 자기가 안 아팠으면 아이유처럼 됐을 거라고 하면서!”

 지난 7일 기자와 통화하는 A씨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가득했다. 희귀질환으로 치료받는 딸(23)을 둔 A씨는 이날 딸과 함께 서울대학교병원 ‘희귀질환 포토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스웨덴 빌헬름 재단과 서울대학교병원 소아 암ㆍ희귀질환지원 사업단의 후원으로 지난 5일부터 8일까지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열린 사진 촬영 행사다. 미진단 희귀 질환 환자 20여명과, 그 가족을 함께 불러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게 목적이다. 이번 프로젝트의 사진은 모두 미국의 사진작가인 릭 귀도티가 맡았다. 귀도티는 이번에 촬영한 작품을 모아 내년 2월 자신의 뉴욕 갤러리에서 특별 전시회를 연다.

A씨 딸은 이날 오전 카메라 앞에서 모델처럼 마음 가는 대로 포즈를 취했다. A씨의 딸은 네 살 무렵 서울대병원을 찾았다. 유난히 발육이 느렸고, 걷고 말하기 힘들어했다. 얼굴 근육이 잘 움직여지지 않아 말을 해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분명히 치료가 필요한 증상들이지만, 질환명을 붙일 수 없었다. 왜 이런 증상이 나타나는지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이후 A씨의 딸은 20여년간‘미진단 희귀질환자’로 살아왔다.

특정 질환을 앓는 인구가 2만명 이하이면 희귀질환으로 분류된다. 희귀질환 가운데서도 병이 생긴 원인을 현재까지의 의학 지식으로 밝히지 못하고, 어떤 병이라고 진단을 내리지 못하는 병도 있다. 이런 병을 ‘미진단 희귀질환’이라고 한다. 병이 왜 생겼는지 알 수 없으니 근본적인 치료를 할 수 없고, 증상을 완화하는 치료가 최선이다.
하지만 의료진은 물론 환자와 보호자도 언젠가 병의 원인을 밝혀내는 날을 위해 포기하지 않았다. A씨의 딸을 20년 가까이 보고 있는 채종희 서울대병원 희귀질환 센터장은 “불편한 증상을 그때그때 치료해주는 식으로 할 수밖에 없다”며 “그런 치료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반응이 원인을 알아내는 단서가 되기도 한다"라고 설명했다. A씨는 “(발병 초기에)아이에게 '엄마' 소리를 한 번 듣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제 아이 노후를 신경 쓸 정도로 세월이 흘렀으니 정말 감사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미진단 희귀질환을 앓는 환자와 그 보호자들은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다. 하나의 병명으로 묶이지 않으니 환우회 같은 데서 정보를 공유하거나, 서로 격려할 수 없어서다. 서울대병원이 포토 프로젝트를 기획한 이유다. 희귀질환 환자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은 환자ㆍ보호자의 동의를 얻어 국제 미진단 질환 네트워크(UDNI)와 관련 학회 등에 공유된다. 최근 인도의 한 미진단 희귀질환 환자의 사진과 신상 정보, 증상 등이 담긴 UDNI 책자를 본 다른 나라 의료진이 “이런 모습과 증상을 가진 환자의 병의 원인을 내가 찾았는데 이 경우도 같을 것 같다”고 연락하면서 진단이 이뤄진 경우도 있다. 이번 프로젝트에서 촬영된 사진들도 UDNI 웹사이트에 게시된다. 채 센터장은 “단순히 환자들에게 용기를 주려고 사진을 찍는 게 아니다"라며 "정보를 공유하고, 궁극적으로 원인을 알고 치료하기 위한 의학적 목적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과거 릭 귀도티 작가가 찍은 크리스틴. 희귀질환인 백색증을 겪고 있다.

과거 릭 귀도티 작가가 찍은 크리스틴. 희귀질환인 백색증을 겪고 있다.

이번에 사진 촬영을 맡은 귀도티 작가는 25년 전부터 희귀질환 환자들의 사진을 찍어왔다. 7일 서울대병원 촬영 현장에서 만난 작가는 “과거 밀라노나 파리, 뉴욕에서 지내면서 (패션 화보 등) 흔히 사람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것들을 찍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1997년 뉴욕 길거리에서 알비노증(백색증)을 겪는 여성을 우연히 만난 일이 변화를 가져왔다. 귀도티는 “너무 아름다워서 알비노증에 대해 찾아봤는데, 무섭거나 슬픈 사진들만 있었다”며 “알비노증의 아름다움을 세상에 좀 알려보는 게 어떨까 생각했고 그게 시작이었다”고 말했다.

릭 귀도티 작가가 7일 오후 서울대병원에서 희귀 질환 환자를 촬영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장진영 기자

릭 귀도티 작가가 7일 오후 서울대병원에서 희귀 질환 환자를 촬영하며 환하게 웃고 있다. 장진영 기자

그간 귀도티의 모델이 된 환자들은 위축돼있었다. 병을 겪으면서 괴롭힘과 따돌림을 당한 탓이다. 귀도티는 "환자들을 촬영할 때 슈퍼모델을 촬영할 때와 똑같이 대했다"라며 "그렇게 찍은 사진을 본 환자는 더는 예전처럼 위축되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어린 환자들을 찍으며 연신 “she is a star! (스타가 따로 없다!)”라며 감탄사를 날렸다.

릭 귀도티 작가가 2006년 찍은 사진. 사진의 주인공은 희귀질환인 말판 증후군을 겪고 있다.

릭 귀도티 작가가 2006년 찍은 사진. 사진의 주인공은 희귀질환인 말판 증후군을 겪고 있다.

이번 프로젝트는 내년에 서울에서 열릴 UDNI의 정기 학술대회의 사전 행사로서도 의미가 있다. UDNI는 전 세계 미진단 환자들을 위해 진단 연구를 하고 공동 치료제 개발도 협력하는 국제기구로 2014년 시작됐다. 국내에선 서울대병원 희귀질환 센터가 2015년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채 센터장은 “미국이나 유럽과 비교하면 아시아권은 미진단학회의 활동 저변이 좁다”며 “우리가 동아시아에서 리더의 역할을 하자는 목표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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