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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엔화·위안화의 전략적 약세, 한국 경제 위협한다

중앙일보

입력

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한ㆍ중ㆍ일 신 환율삼국지

한ㆍ중ㆍ일 환율 전선에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다.

 3국 통화 모두 달러화 대비 약세 국면이다. 그러나 일본 엔화와 중국 위안화의 약세가 원화를 훨씬 능가한다. 중국과 일본은 세계 2, 3위 경제다. 양국 모두 한국의 주요 수출입 대상국이자 글로벌 시장의 경쟁 상대다. 엔화와 위안화의 동반 약세는 한국 경제로선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미ㆍ중 패권 경쟁과 공급망 재편 와중에 환율 전쟁의 먹구름이 다가오고 있다.

올해 엔화 10.2%↓, 위안화 5.1%↓
원화는 엔·위안화보다 덜 내려

엔저로 일본 증시 끓고 경기 호전
중국 경기 회복 느려 위안화 약세

중·일 통화 절하로 경기진작 노려
한, 물가와 경기 사이 환율 딜레마

일본은행, 무제한 금융완화 지속

 지난달 말 달러당 엔화가치는 144.3엔. 올 상반기 10.2% 떨어졌다. 올해 흐름은 지난해 9~10월 일본 외환 당국의 대규모 개입이 이뤄졌던 시기와 유사하게 진행되고 있다. 당시 엔화가치는 151.94엔까지 떨어져 32년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일본은 엔화 가치 폭락을 막기 위해 세 차례에 걸쳐 약 680억 달러를 풀고 엔화를 사들였다. 달러당 150엔이 당국의 마지노선이었다. 엔화가치는 이후 방향을 틀어 꾸준히 뛰어올랐는데, 연초부터 다시 내림세로 돌아섰다.

 엔화 약세의 핵심 배경은 세계 주요국과의 금리 격차다. 일본은 코로나19 이후 인플레이션 상황에서도 대규모 금융완화를 지속하며 마이너스 금리(-0.1%)를 고수했다. 반면 미국과 유럽 등은 고강도 긴축으로 금리를 끌어올렸다(미국 기준금리 5~5.25%, 유로존 4%). 금리만 고려하면 엔화를 달러화나 유로화로 바꿔 투자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엔저(円低)의 질주’는 지난 4월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BOJ) 총재 취임 당시의 시장 전망과 사뭇 다른 양상이다. 아베노믹스의 집행관이었던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가 물러남에 따라 우에다가 아베노믹스의 주축인 마이너스 금리에 종지부를 찍고 통화정책 정상화에 착수할 것이란 기대가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에다는 오히려 무제한 금융완화를 지속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긴축이 늦어져 2%를 넘는 인플레이션이 지속하는 리스크보다 졸속 긴축으로 2%를 실현할 수 없게 되는 리스크가 더 크다”는 우에다의 지난 4월 발언도 그중 하나다.

당국 개입이 엔저 되돌릴지 불확실

 엔화가치 하락 패턴은 지난해 하반기와 유사하지만, 경제 상황은 아주 다르다. 작년엔 증시가 지금처럼 뜨겁지 않았다. 닛케이 평균주가는 지난달 중순 33년 만에 3만3000엔을 돌파했다. 작년 10월(닛케이 지수 2만7000엔대)보다 20% 이상 뛰었다. 엔화를 헐값에 싸서 일본 주식을 사려는 외국인 자금 유입이 증시에 계속 불을 때고 있다. 경기 회복 조짐도 뚜렷하다. 지난 1분기(1~3월) 성장률이 0.7%, 연율로는 2.7%를 기록했다. 과거만 못하다고 하지만, 엔화 약세가 수출 증대와 관광객 유치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건 분명하다. 한마디로 일본 경제 곳곳이 ‘엔저’를 만끽하고 있다.

 그러나 과도한 엔저는 수입물가 급등 등 부작용이 따른다. 이번에도 엔·달러 환율이 150엔 선에 근접하면 외환 당국이 시장 개입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많다. 이미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상이 “지나친 움직임이 있으면 적절히 대응하겠다”고 몇 차례 구두개입을 했다. 하지만 긴박감이 작년 같지 않다. 일본 당국엔 달아오른 증시와 경기에 찬물을 끼얹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당국이 개입에 앞서 시장 참가자에게 시세를 묻는 ‘환율 체크(rate check)’가 아직 없다고 전했다. 무엇보다 기시다 정부도, 우에다 총재도 엔저를 가져온 펀더멘탈에 변화를 줄 의향이 없어 보인다. 미 연준(Fed)이 연내 추가 금리 인상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지만, BOJ는 금융완화에 브레이크를 밟을 생각이 없다. 블룸버그 서베이에 따르면 BOJ의 마이너스 금리 해제 시기가 2024년 하반기 이후일 것이라는 응답이 65%나 된다. 일본 정부의 시장 개입이 엔화가치 추가 하락을 저지할 수는 있다. 그러나 미ㆍ일 금리 격차가 더 벌어지는 상황이라면 엔화 약세 흐름이 완전히 방향을 바꾸기는 쉽지 않다.

리오프닝에도 중국 경제 부진 지속

 지난해 10월 중국 위안화 가치는 달러당 7.3위안을 돌파해 15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이후 오름세로 돌아섰던 위안화 가치는 연초부터 다시 하락 행진을 시작했다. 지난달 말 달러당 위안화 가치는 7.25위안. 8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올해 들어 5.1% 떨어졌다.

 위안화 약세 배경도 기본적으로는 주요국과의 금리 차이다. 중국은 코로나 이후 미국이나 유럽과 반대로 금리를 계속 내렸다. 지난달 20일에도 10개월 만에 금리를 인하했다(1년 만기 대출 우대금리 3.65%→3.55% 등).

 그러나 위안화 약세엔 엔화와 다른 요소가 작용한다. 경기 부진이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미ㆍ중간 금리 격차와 함께 중국의 느린 경기회복이 위안화 약세의 핵심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일본은 엔저가 경기 호조를 자극하고 있는 단계라면 중국은 경기 부진이 위안화 약세를 만들고 있다.

 올 초 리오프닝(경제활동 재개) 이후에도 중국 경기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고 있다. 중국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6월에도 49에 그쳤다. 4월 이후 3개월 연속 50 아래에 머물고 있다. PMI가 50보다 높으면 경기 확장, 50보다 낮으면 경기 수축을 의미한다. 1~5월 고정자산투자는 4% 증가에 그쳤다. 5월 산업생산도 3.5% 증가에 불과했다. 같은 달 수출은 작년보다 7.5% 줄고 수입은 4.5% 감소했다. 경기 부진은 고용시장에서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5월 16~24세 청년 실업률은 20.8%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소비심리가 얼어붙은 게 특히 문제다. 미국의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즈는 위안화 예금이 올 1분기에 41% 늘어난 것을 지목한다. 당국의 내수 부양책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이 지갑을 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월부터 석 달 연속 0%대에 머물렀다. 부동산 침체도 여전하다. 금융데이터 업체 윈드에 따르면 5월 중국 주요 30개 도시 신규주택판매는 코로나 전인 2019년보다 77% 감소했다.

 중국은 오랫동안 위안화를 기축통화로 만들기 위해 위안화 가치 안정화에 주력해왔다. 그러나 경기가 회복되지 않으면 위안화 국제화는 미뤄두고 위안화 약세 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가능성이 있다. 내수 진작을 위해 금리 인상은 엄두를 내기 어렵고, 수출 촉진을 위해선 위안화 약세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한국, 엔저ㆍ위안화 약세에 포위

 원화가치도 올해 들어 하락세다. 지난달 말 달러당 원화가치는 1316.3원. 상반기에 4.3% 떨어졌다. 역시 주된 이유는 한ㆍ미간 금리 차이다. 한국이 지난 1월 이후 기준 금리 인상을 멈추면서 양국 간 기준금리 격차는 역대 최대인 1.75%포인트로 벌어져 있다.

 원화가치가 떨어졌다곤 해도 엔화와 위안화만큼은 아니다. 엔화와 위안화에 비교하면 원화가 상대적으로 강세라는 의미다. 특히 원ㆍ엔 재정환율은 지난달 중순 100엔당 897.49원을 기록하기도 했다. 100엔당 원화 환율이 800원대로 떨어진 것은 2015년 6월 이후 8년 만이다. 이후 900원대 초반을 오가고 있다.

 이 정도의 엔저는 한국 경제에 회오리바람을 몰고 온다. 당장 일본을 찾는 한국 관광객이 급증하고 있고, 일본 주식 투자가 크게 늘었다. 특히 수출에 영향을 준다.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과 가장 경쟁 관계에 있는 국가가 일본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수출에 환율 효과가 줄었다고 해도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달러 대비 엔화가치가 1%포인트 하락하면 한국 수출 금액이 0.61%포인트 감소한다는 분석(한국경제연구원, 2022년 11월)도 있다. 위안화 약세도 한국 경제를 힘들게 한다. 한ㆍ중 경제는 보완 관계에서 경쟁 관계로 성격이 달라졌다. 전기차, 배터리, 조선 등 최종재는 물론 중간재에서 한ㆍ중간 경합 품목이 부쩍 늘었다. 위안화 약세는 중국의 가격경쟁력을 높여 한국 제품을 위협한다.

 엔저와 위안화 약세는 일본과 중국의 전략적 선택이다. 일본은 디플레이션 늪에서 탈출하기 위해 엔저를 즐기고 있고, 중국은 경기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위안화 약세를 용인하고 있다.

 반면 한국의 환율 정책은 딜레마 상황이다. 물가 상승을 바라는 일본이나 물가가 바닥으로 가라앉은 중국과 처지가 다르다. 환율 상승(원화 약세)은 물가를 자극할 위험성이 크고, 환율 하락(원화 강세)은 수출에 불리하다. 사회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물가를 희생하더라도 수출을 늘리는 것에 대한 반론이 만만치 않다. 수출 경쟁력을 위해 시장 개입도 불사했던 ‘환율 주권론자’ 목소리도 별로 들리지 않는다.

 김정식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미국의 금리 인상 행진으로 세계 경제 침체 가능성이 커지자 일본과 중국이 엔저와 위안화 약세로 대응하는 상황”이라며 “앞으로 한국 경제에 어려운 상황이 생길 수 있는 만큼 경각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경제 대국 중국과 일본의 공세적인 자국 통화 평가절하(위안화 약세와 엔저)가 한국 경제를 새로운 시험대에 올려놓고 있다.

글=이상렬 논설위원  그림=김아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