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이 뜨겁다. 이탈리아 럭셔리 브랜드 ‘불가리’가 지난달 23일부터 국제갤러리에서 시작한 전시 ‘불가리 세르펜티 75주년, 그 끝없는 이야기’ 때문이다. 6월 23일 전시 개관 날부터 관람객이 몰려들더니, 5일 뒤인 28일엔 불가리 최고경영자(CEO) 장-크리스토프 바뱅과 브랜드 앰배서더 리사까지 이곳을 찾았다. 이번 전시는 불가리의 대표적인 상징물이자 컬렉션인 '세르펜티'의 출시 75주년을 맞아 마련한 행사다.
세르펜티(Serpenti)는 ‘뱀’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로, 유럽에서 뱀은 재생·변화·부활·불멸·지혜 등을 상징하는 동물로 여겨져 왔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오피오스가 언제나 뱀이 감긴 지팡이를 가지고 다닌 게 대표적이다. 뱀이 신비의 약초를 물어와 죽어있는 다른 뱀을 살리는 광경을 보고, 지팡이에 뱀을 감아 다닌 것이 기원이 됐다. 이후부터 뱀은 의술이나 의사의 상징물로 쓰인다. 앰뷸런스나 의사협회 로고에 뱀 모양의 로고가 새겨진 이유다. 불가리 측은 이번 행사를 통해 국내에 뱀의 이미지를 새롭게 재정의하고자 했다.
할리우드 여배우도 반한 '불멸' 상징
불가리는 뱀이 가진 에너지와 생명력에 집중해 1948년 첫 세르펜티 주얼리를 세상에 선보였고, 이후 브랜드를 상징하는 대표 주얼리가 됐다. 세르펜티는 특히 대담하고 강렬한 여성상을 표현하고 싶었던 미국 할리우드 여배우들에게 사랑받았다. 영화 ‘클레오파트라’(1962년)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손목에 착용했던 에메랄드 눈을 가진 뱀 모양의 팔찌가 바로 세르펜티였다. ‘노트르담의 꼽추’(1956년)의 주인공 지나 롤로브리지다는 파티에서 세르펜티 시계를 즐겨 착용했다. 또 뉴욕 패션 업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했던 패션잡지 보그 편집장 출신의 다이애나 브랠랜드는 유독 이 주얼리를 좋아해, 금으로 만든 불가리의 스네이크 벨트를 목에 두 겹으로 둘러 목걸이처럼 걸고 공식 석상에 나타나곤 했다.
국제갤러리의 첫 브랜드 대관 협업
이번 전시는 세르펜티의 역사를 이야기로 풀어내며 세계 각 나라의 작가들과 함께 선보이는 릴레이 전시회 중 하나다. 지난 2월 스페인 마드리드의 티센 보르네미사 국립미술관을 시작으로 런던·뉴욕·상하이를 거쳐 이달 한국에 왔다. 국내에선 국제갤러리와 협업해 뱀의 이야기가 담긴 한국 작가의 작품들을 보여준다.
이번 불가리의 전시는 자신들의 제품을 앞에 내세우고, 예술 작품은 곁다리로 붙이는 여느 브랜드 행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국제갤러리와의 협업을 통해 선정한 작가와 작품을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들의 세르펜티 제품은 맨 마지막 관에서 경험하게 한다. 뱀의 예술적 이야기를 먼저 경험한 뒤, 자신들의 제품을 보길 원했다. 뱀과 연관된 서사를 상업성 없이 소비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브랜드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때문일까. 국제갤러리는 전시 협업뿐 아니라 전관을 이번 행사에 흔쾌히 내줬다. 국제갤러리가 사기업에 전관을 내어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갤러리 측은 "두 브랜드는 오랫동안 날카로운 지성미나 견고한 여성성을 추구해왔다"면서 "이런 공통점을 가진 두 브랜드의 결합이 상당히 흥미롭고 의미가 있을 거라 생각해 전시를 수락하게 됐다"고 밝혔다. 국제갤러리는 세르펜티의 착용자상으로 삼고 있는 ‘진취적인 여성상’을 보여주는 천경자, 최욱경, 함경아, 홍승혜, 최재은 등 걸출한 한국 여성 작가들의 작품을 모았다. 이중 홍승혜, 최재은 작가는 세르펜티를 모티프로 한 협업 작품을 제작해 공개했다. 여기에 더해 20세기 누보 레알리즘을 대표하는 프랑스 조각가 니키 드 생팔의 ‘아담과 이브’ ‘나나 상테’ 등 작품 11점은 불가리가 미국 니키 자선예술재단(Niki Charitable Art Foundation, NCAF)을 통해 들여왔다.
대담함·진취성 등 뱀의 상징성 보여줘
또한 1950~60년대에 만들어진 시계와 주얼리, 그리고 수억 원이 훌쩍 넘는 하이 주얼리 등 세르펜티 제품 수십 점이 함께 전시된다. 루비·다이아몬드로 뱀 머리를 장식한 ‘세르펜티 투보가스 시계’, 초록빛 에메랄드로 온몸을 장식한 팔찌 ‘세르펜티 레인 포레스트 하이 주얼리 브레이슬릿’, 34캐럿이 넘는 카보숑 루벨라이트 보석을 입에 문 뱀 모양의 다이아몬드 목걸이 ‘세르펜티 이클립스 하이 주얼리 네크리스’ 등이 이번 전시에서 챙겨 봐야 할 대표 제품들이다.
전시는 이달 31일까지 네이버 예약을 통해 무료로 관람할 수 있는데, 7월 중순까지 금~일요일은 대부분의 예약이 마감된 상태다. 전시 기간 중 갤러리 현장에서 직접 찾아가 기다리면, 예약 없이도 입장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