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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혜수의 카운터어택

뷰티풀 경기장의 뷰티풀 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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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장혜수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장혜수 콘텐트제작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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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카사블랑카’(1942) 속 명대사는 80년 넘게 지난 요즘도 종종 만난다. 대표적인 게 남주인공 릭(험프리 보가트)이 여주인공 엘사(잉그리드 버그만)에게 술을 권하며 하는 “그대 눈동자에 건배(Here is looking at you, kid)”다. 그에 버금가는 대사라면 릭이 정부 이본(마들렌 르보)에게 하는 말일 거다. 전날 밤 행적을 묻는 이본에게 릭은 “어젯밤은 너무 오래전이야. 기억나지 않아(That’s so long ago, I don’t remember)”라고 대답한다. 현실에서도 가끔 ‘어젯밤’만큼 가까운 과거조차 ‘너무 오래전’이라는 식으로 반응하고, 결국 ‘기억나지 않는’ 듯 행동하는 경우를 만난다.

20일 개막하는 여자월드컵 개최국 뉴질랜드에서 선보인 자연 친화적 축구장. 한 경기만 치른 뒤 원상 복구했다. [AP=연합뉴스]

20일 개막하는 여자월드컵 개최국 뉴질랜드에서 선보인 자연 친화적 축구장. 한 경기만 치른 뒤 원상 복구했다. [AP=연합뉴스]

한동안 잊고 있던 강원도 정선의 가리왕산 소식이 최근 들려왔다. 정선군이 가리왕산 케이블카 이용료를 1만원에서 1만5000원으로 인상했다는 소식이다. 가리왕산에는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당시 스키 알파인 활강경기가 열린 스키장이 있었다. 올림픽 직후 복원하기로 하고 원시림을 훼손하면서까지 만든 스키장이다. 대회가 끝난 지 벌써 몇 해인데, 복원은커녕 사람을 실어나르는 케이블카가 다니고 있다 한다.

올림픽 이후 산림 복원을 주장하는 ‘원칙론’ 측과 관광시설 개발을 주장하는 ‘현실론’ 측이 갈등했다. 2011년 올림픽 유치로 경기장 건설 문제가 현실이 됐을 때도, 2015년 가리왕산 스키장을 착공했을 때도, 2018년 올림픽을 마쳤을 때도 ‘약속’은 분명히 ‘복원’이었다. 강원도와 정선군 등은 약속이 ‘너무 오래전’이라 ‘기억나지 않는 듯’ 반응해왔다. 결국 지난해 ‘2024년까지 한시적 케이블카 운영’이라는 미봉책이 등장했다.

최근 정선군은 “가리왕산에 국가정원을 유치하겠다”고 나섰다. 원시림을 훼손하더니, 그곳에 정원을 만들 작정이다. 다음 수순도 보인다. 관광객 편의를 위해 케이블카를 존치하겠다고, 어쩌면 추가 설치가 필요하다고 할 거다. 그 과정에서 금액으로 표시된 경제파급 효과를 내세울 거고, 가끔 어려운 지방자치단체의 상황을 들며 읍소할 거다. 2011년 이래 쭉 그랬던 것처럼.

지난달 뉴질랜드에서 광활한 평원에 축구장이 세워진 멋진 사진이 전해졌다. 뉴질랜드는 호주와 함께 오는 20일 개막하는 2023년 국제축구연맹(FIFA) 여자월드컵 공동 개최국이다. 개막 한 달을 앞두고 뉴질랜드관광청이 자국 최고봉인 쿡산 앞 매켄지 컨트리 평원에 지은 축구장을 공개했다. 중장비 없이 수작업으로만 6주에 걸쳐 만들었다고 한다. 경기장에서는 ‘뷰티풀 게임’으로 명명된 소녀팀 간 축구 경기가 열렸다. 경기 후 축구장은 원래 모습인 평원으로 되돌아갔다. 놔두면 틀림없이 관광명소가 될 만했다. 하지만 ‘복원’이 ‘약속’이었기에, 그걸 잊지 않았고 그렇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