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하지만 어디도 진정한 나는 없다"...'천의 얼굴' 셔먼의 자화상 [더 하이엔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02면

마스카라의 검은 눈물이 줄줄 흘러내릴 정도로 슬프게 울고 있는 한 여성. 한 손엔 반쯤 태운 담배와 술잔이 쥐어져 있다. 이 여인은 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토록 슬프게 울고 있는 것일까. 또 다른 사진엔 코와 입을 새빨갛게 칠하고 무지갯빛 가발을 쓴,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피에로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이 두 사람은 같은 사람으로, 직접 작품의 모델이 된 작가 신디 셔먼이다.

신디 셔먼의 '울고 있는 소녀'(UNTITLED FILM STILL #27, 1979) ⓒ 2023 Cindy Sherman [사진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

신디 셔먼의 '울고 있는 소녀'(UNTITLED FILM STILL #27, 1979) ⓒ 2023 Cindy Sherman [사진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 사진전
신디 셔먼의 ‘온 스테이지-파트Ⅱ’
자신이 직접 연출·촬영에 모델까지
1979~2019년의 10점 작품 전시

루이 비통이 최근 자체 예술 기관인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을 통해 유명 작가들의 전시를 잇달아 개최하고 있다. 이번엔 미국 아티스트 신디 셔먼의 개인전 ‘온 스테이지-파트Ⅱ’다. 지난달 30일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 있는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루이 비통 메종 서울 4층)에서 시작한 전시를 찾았다.

루이 비통의 신디 셔먼 사진전 ‘온 스테이지-파트Ⅱ’. [사진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

루이 비통의 신디 셔먼 사진전 ‘온 스테이지-파트Ⅱ’. [사진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

이번 전시는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의 컬렉션 소장품을 서울, 도쿄, 뮌헨, 베네치아, 베이징 등에 소개하는 ‘미술관 벽 너머(Hors-les-murs)’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신디 셔먼의 전시는 2021년 베이징에서 '온 스테이지'란 제목으로 처음 열렸다. 이번 서울 전시는 2년 만에 열리는 셔먼의 두 번째 전시다. 작품 수는 총 10점. 많지 않은 작품 수이지만, 작가의 예술 세계를 광범위하게 보여준다.  셔먼의 젊은 시절인 1979년도 초기작부터 시작해, 1980년대 초반부터 2019년까지 패션 브랜드·잡지와 작업한 패션 필름, 유럽 귀족과 종교인의 초상화를 오마주한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작품까지 구성이 다채롭다.

무한히 변신하는, 신비에 싸인 아이콘
첫 작품은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시리즈인 '무제 필름 스틸(Untitled Film Stills)' 중 하나다. 무제 필름 스틸은 1977년부터 80년까지 이어진 총 69점의 흑백필름 작품이다. 신디 셔먼은 분장한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변형시켜 작업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무제 필름 스틸 시리즈엔 마치 70~80년대 어느 영화나 드라마에서 봤을 법한 인물과 장면을 보여준다. 놀라운 것은 이 장면을 연출하고, 찍고, 찍히는 모든 것을 신디 셔먼 혼자 했다는 점이다.
사진을 혼자 촬영까지하다 보니 선이 길게 연결된 셔터 버튼을 손에 들고 있는 모습도 종종 찍혔는데, 이를 그대로 노출해 작품의 한 요소로 보여주기도 한다. 완벽한 모습보다는 자연스럽고 우스꽝스러운 요소를 넣겠다는 그만의 풍자 방식이다. 이번 전시에 나온 '역사 인물화(History Portraits, 1989~90)'와 '광대(Clown, 2003)'는 등장인물의 모습을 거부감이 느껴질 정도로 우스꽝스럽고 기괴하게 표현했다.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더 아름다워질까에 집착하는 게 넌더리가 난다"고 말했던 셔먼은 자연스러운 모습이 진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고 믿었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오히려 비틀고 꼬집었다.

신디 셔먼의 작품 '남성(UNTITLED #602, 2019)'. ⓒ 2023 Cindy Sherman [사진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

신디 셔먼의 작품 '남성(UNTITLED #602, 2019)'. ⓒ 2023 Cindy Sherman [사진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

작품 '역사 인물화(UNTITLED #212,1989)'. ⓒ 2023 Cindy Sherman [사진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

작품 '역사 인물화(UNTITLED #212,1989)'. ⓒ 2023 Cindy Sherman [사진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

작품 '광대(UNTITLED #411, 2003). ⓒ 2023 Cindy Sherman [사진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

작품 '광대(UNTITLED #411, 2003). ⓒ 2023 Cindy Sherman [사진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

패션계가 열광한 아름답지 않은 패션필름
1980년대부터는 패션 사진을 통해 자신만의 해학과 풍자를 이어갔다. 아름답게 옷을 차려 입은 모델 대신, 입술을 하얗게 칠하고 흐트러진 모습의 자신을 찍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모습이 패션 디자이너들에겐 매력적으로 다가갔고, 그와 작업하길 원했다. 지난 4월 전시 '신디 셔먼-안티 패션' 전을 시작한 독일 슈투트가르트 시립미술관의 크리스티앙 랑에 관장은 "셔먼의 사진은 누구에게나 영감과 충격, 매혹을 동시에 선사하며 오늘날 우리가 패션을 다른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사진은 아름다움과 패션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고 밝힌 바 있다.
전시 포스터로 사용된 작품 '남성(Men, 2019)'에서 셔먼은 중년의 남성으로 분장했다. 스텔라 매카트니 남성복 재킷을 입고 안엔 80년대 작업했던 사진을 새긴 티셔츠를 입었다. 물론 티셔츠의 여성 또한 셔먼, 자신이다. 남성으로 분장하면서, 입은 옷엔 '여성'인 자신을 의도적으로 녹여냈다. 인물 뒤 배경은 디지털 작업으로 좌우를 복제한 데칼코마니 기법으로 만들었다. 이를 통해 실재와 허구, 진실과 거짓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 셔먼이 구현하는 방대한 인간 희극에는 무엇 하나 고정적인 것이 없다. 전시는 무료로, 오는 9월 17일까지 열린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