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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기찬의 인프라

실업급여도 못 타는데 보험료만 꼬박꼬박…근로시간의 함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한 달에 1시간만 일해도 모두 고용보험 가입자로 신고하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과태료 폭탄을 맞을 수 있으니까요. 이러다 보니 실업급여를 탈 수 없는 사람조차 보험료만 꼬박꼬박 내고, 혜택은 못 보는 상황이 됩니다.”

서울의 모 세무회계사무소 관계자의 말이다. 근로시간이 짧아 실업급여 대상도 아닌 근로자의 고용보험료까지 회사가 내고 있다는 얘기다. 근로자도 보험료 절반을 임금에서 떼 내 납부하게 된다. 회사나 근로자가 모두 고용보험료로 돈을 허비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게 무슨 말일까.

고용보험 가입기준이 근로시간
일한 시간 파악해야 들 수 있어
배달기사 등 사각지대에 방치
소득 기준으로 제도 개선해야

월 60시간 넘어야 고용보험 혜택

고용보험료 적용 기준이 근로시간이어서 생기는 불합리한 현상이다. 현재는 월 60시간 이상 일한 근로자에게만 고용보험 혜택이 주어진다. 따라서 근로시간 관리가 어렵거나 여러 회사에서 단시간으로 일하는, 이른바 ‘메뚜기 근로자’는 고용보험에서 누락될 수밖에 없다. 사각지대가 생긴다는 얘기다. 고용보험 대상자를 누락하면 해당 기업에 과태료 부과와 같은 제재가 취해진다. 이러니 회사 입장에선 일단 보험료를 납부하는 쪽을 택한다. 근로자가 다른 회사에서도 일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제재부터 피해 보자는 생각에서다.

한데 고용보험 적용 대상은 지속해서 확대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임금 근로자에 한해서 고용보험을 적용했다. 그러나 산업구조와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고용형태가 다양화했다. 회사에서 일하는 근로시간이 아니라 실적이나 성과로 보상을 받는 사람이 늘었다는 의미다. 보험설계사, 신용카드 회원 모집인, 대출 모집인, 학습지 방문 강사, 택배 기사, 가전제품 배송·설치 기사, 골프장 캐디, 예술인, 어린이 통학버스 기사, 방과 후 학교 강사 등이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이들이 최근 몇 년 사이에 고용보험 적용 대상자로 편입됐다. 무려 142만5000명이다. 문제는 이들의 근로시간을 측정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근로시간을 기준으로 적용하는 고용보험의 실효성 있는 작동을 기대하기 힘들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고용보험의 적용 기준을 근로시간에서 소득, 즉 노동시장에서 얻는 일정 수준 이상의 보수를 기준으로 고용보험을 적용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필요성은 그동안 꾸준하게 제기돼 왔다. 그러나 소득파악체계가 구축되지 않아 시행할 수 없었다. 국세청과 고용보험료 부과를 책임지는 근로복지공단이 따로 돌아갔다. 경기도 수원에서 신발점을 운영하는 이모(46)씨는 “직원을 채용해서 보수를 지급할 때마다 국세청과 4대 사회보험 기관에 비슷한 신고를 각각 해야 해서 여간 불편한 게 아니다”고 말했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정부도 이런 문제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제도 개선에 나섰지만 명확한 대책은 나오지 않고 있다. 국세청과 근로복지공단 간 실시간 소득 정보 연계를 위한 전용선을 지난해 10월에야 구축했다. 데이터베이스 등을 정비한 뒤 적용 기준을 근로시간에서 소득으로 전면 전환하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이렇게 되면 누락돼 사각지대에 방치된 고용보험 대상자를 국세 정보로 찾을 수 있고, 보험료의 부과와 정산, 지급 작업도 정확해진다. 실제로 임금 근로자만 따져도 2021년 상용근로소득 연말정산자는 1996만 명이었는데, 그해 고용보험 가입자는 1455만 명에 불과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고용보험 가입 대상이 아닌 65세 이상이나 공무원, 기업의 등기 임원 등을 제외해도 상당 규모가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못하고 누락된 상황”이라고 말했다. 예술인·노무제공자(플랫폼 종사자 등) 부문에서도 고용부가 지난해 누락을 확인해 직권 조치한 인원만 94만7000명에 달한다.

물론 세부적인 적용 방식의 변화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우선 단순히 적용 기준만 소득으로 전환할 것이 아니라 보험료 부과 방식도 매월 신고되는 월 보수액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 현재는 전년도에 신고된 보수 총액을 기준으로 부과하다 보니, 현시점에서 전년보다 소득이 적은 데 보험료를 그 기준으로 더 내거나 반대로 전년보다 소득이 많은데도 적게 내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어서다.

근로자·예술인 등 구분해 적용해야

실업급여 지급 기준도 변경이 불가피하다. 현재 실업급여는 평균임금, 즉 3개월간 지급된 임금을 근무 일수로 나눈 금액을 기준으로 지급한다. 고용보험 적용 기준이 보수로 바뀌면 고용보험의 혜택 중 하나인 실업급여 지급 기준도 부과 기준과 같은 보수로 통일해야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고, 효율성을 높일 수 있다. 특히 보수에는 휴가비나 퇴직위로금 등이 포함되기 때문에 1년 이상 일을 하면 실업급여를 더 받을 수 있게 된다. 짧게 일하고 실업급여를 타는, 이른바 반복수급의 부작용을 줄일 수 있을 전망이다.

장기적으로는 고용보험 체계를 근로자, 예술인·노무제공자, 자영업자 등 세 가지 군으로 구분 편제해 관리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각 군별로 적용 기준과 피보험 단위 기간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임금 근로자가 낸 고용보험기금을 다른 군과 통합해 관리·운용할 경우 징수와 지출 등에서 형평성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고용부 관계자는 “현재 기금 관리 체계상 자영업자는 분리되어 있지만, 근로자와 예술·노무제공자는 분리가 안 돼 있다”며 “예술·노무제공자의 경우 지금은 가입자가 적어서 큰 문제가 없지만, 가입자가 늘어나는 것을 고려해 구분 관리도 따져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