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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하현옥의 시선

‘낭만 닥터’를 강요하는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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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하현옥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하현옥 경제산업 부디렉터 겸 증권부장

 “우리가 하는 일은 다치고 아픈 사람 치료해주는 일이야. 시작도 거기고 끝도 거기여야 돼. 그 외 다른 건 다 부질없는 잡소리다.” (김사부)

 “사명감? 대한민국 의료계가 그 사명감이라는 목줄에 의사들을 옭아매 놓고 얼마나 혹사시키는지 너도 잘 알면서 그런 말을 해?” (차진만)

 “그럼에도 사명감 없이는 안 되는 일이니까. 그거 없이는 빌어먹을 이놈의 병원 시스템이 돌아가질 않으니까. 어쩔 거야, 그럼? 그렇다고 그냥 죽어 나가는 환자들 앉아서 보고만 있을 거야?” (김사부)

 “대체 언제까지, 그런 말로 저들의 무례함을 참아줘야 하는 건데? 죽음을 고쳐줘도 돌아오는 건 욕설과 원망뿐인데.” (차진만)

 드라마 ‘낭만닥터 김사부3’의 이 장면은 한국 의료계가 직면한 문제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응급 상황 속 우선순위에서 밀린 도의원 아들이 사망하며 의료 소송에 걸린 돌담병원 외상센터장 차진만. 재판에 출석하느라 병원을 비운 사이 건물 붕괴 사고로 외상센터로 환자들이 몰려든다. 돌담병원 외과과장 김사부는 재판에서는 이겼지만 환자를 내팽개치고 법정에 선 차진만을 비난한다. 사명감 없이는 굴러가지 않는 ‘빌어먹을 병원 시스템’의 문제를 인정하면서도 말이다.

 ‘낭만 닥터’와 ‘현실 닥터’를 대표하는 이 두 사람의 대립은 한국 의료의 이상과 현실을 대변한다. 환자를 살려야 한다는 지상 명제는 그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지고의 가치다. 이 지상 명제와 지고의 가치를 흔들림 없이 지켜가는 ‘낭만 닥터’ 김사부는 누구나 원하는 의사다.

 하지만 그런 의사를 현실에서 찾기는 어렵다. 의사의 문제라고 하기엔, 글쎄다. 조금 과장하자면 김사부처럼 되려면 의사를 포함한 의료인은 생활인이기를 포기하고, 때로는 폭력과 폭언에 익숙해지며, 경찰 조사와 기소에도 의연하게 잠재적 범죄자가 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사실 이런 우려는 과장이 아닐 수 있다. 지난 3월 건물에서 추락한 17살 학생이 응급실을 찾아다니다 구급차에서 숨진 ‘응급실 뺑뺑이’ 사건과 관련해 대학병원 응급의학과 전공의가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환자의 사망은 안타깝고 슬픈 일이지만, 의료 체계의 문제를 응급실 의사를 희생양 삼아 무마하려 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응급의학과 전문의 자격증이 ‘교도소 티켓’이라는 섬뜩한 자조까지 나온다.

‘응급실 뺑뺑이’로 환자 사망하자
응급의학과 의사, 피의자로 조사
'제2의 이대목동병원' 사태 우려 

 이번 사건이 ‘제2의 이대목동병원 사태’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도 있다. 2017년 이대목동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한 신생아 4명이 패혈증으로 연달아 숨졌다. 신생아 중환자실을 담당했던 의료진은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됐지만, 대법원에서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교수 3명은 구속됐다. 이 사건의 후폭풍은 컸다. 낮은 수가에 형사처벌과 소송의 위험까지 커지자 전문의 지원자가 급감하며, 소아청소년과의 붕괴가 가속화했다. 최근 벌어지는 소아과 대란의 출발점이다.

 수억 원의 연봉을 내걸어도 풀리지 않는 필수 의료과 의사 구인난의 이면에도 과도한 형사 처벌이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민·형사 소송이 빈번한 진료과에 대한 전공의 지원 기피 현상은 해당과의 인력 부족으로 이어진다. 게다가 대형병원이나 국·공립병원과 달리 민·형사 소송 지원 체계가 상대적으로 열악한 상황에서 소송 등에 휘말리면 의사 개인이 관련 부담을 모두 감당해야 한다.

 필수 의료과 의료 공백 해결을 위해 의대 정원 확대와 외국인 의사 수입 등이 거론된다. 하지만 의대 정원을 늘려도 필수 의료과 의사가 늘지는 의문이다. 의대 지원자나 부모의 머릿속에는 형사 책임질 일 없는 편하게 돈 버는 과만 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외국인 의사는 어떨까. 대한의사협회 의료정책연구소가 발표한 ‘의료행위의 형별화 현황과 시사점’에 따르면 활동 의사 수 대비 주요 국가의 기소율을 보면 한국은 0.5%인데 영국은 0%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얼마나 센 연봉과 처우를 제시해야 한국에서 일할까.

 무조건 의사 편을 들자는 게 아니다. 의료 현장에서 빚어지는 문제적 상황을 의사의 이기심 탓으로 몰고 가서는 사태를 해결할 수 없다. ‘돈만 밝힌다’는 의사가 수억 원의 연봉도 마다하는 이유, 그걸 풀 방법을 찾는 게 꼬일 대로 꼬인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주 52시간 시대에 주당 100시간에 육박하는 전공의 근무시간을 무심히 넘기고, 너도나도 ‘저녁이 있는 삶’을 추구하는 시대에 의사에게만 밤새 응급실을 지키는 ‘낭만 닥터’를 강요해선 안 된다. ‘빌어먹을 시스템’을 고쳐야 사명감에도 기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