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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대한민국 조롱하는 벌처펀드

중앙일보

입력

이현상 기자 중앙일보 논설실장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폴 싱어 회장은 명문 로체스터대 심리학과와 하버드대 로스쿨을 나왔다. 그래서인지 그의 투자 기법은 심리와 법이 교묘하게 얽혔다는 평가를 받는다. 심각한 채무 위기를 겪던 아르헨티나 국채에 투자해 막대한 이익을 거둔 것도 그런 예다.

 엘리엇은 1990년대 중후반 액면가 20% 수준에 아르헨티나 국채를 사들였다. 2001년 아르헨티나가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한 뒤 채권자 93%가 액면가 3분의 1 정도만 받기로 타협했지만, 엘리엇은 요지부동이었다. 다른 국채 보유자들이 사라질수록 끝까지 버틴 자신은 유리해질 것으로 봤다. 죄수의 게임이었다.

ISDS 소송서 승리 선언한 엘리엇
한국을 부패국 묘사, 오만한 태도
정부는 당연히 불복 절차 밟아야
투기자본에 대한 방어대책 절실

 이런 배짱을 받친 것은 ‘창조적’ 소송 기법이다. 엘리엇은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의 준비금, 연기금은 물론이고 미국 소재 아르헨티나 위성발사대, 아프리카 가나에 입항한 군함까지 압류를 시도했다(군함은 실제로 두 달간 억류됐다). 성공하진 못했지만, 아르헨티나에 압박을 주기엔 충분했다. 엘리엇은 14년 소송전 끝에 2015년 아르헨티나로부터 24억 달러를 받아냈다. 투자 원금 대비 1270%의 초고수익이었다.

 이런 ‘심리와 법’의 고수 엘리엇이 한국 정부를 도발했다. 정부의 1300억원 배상 책임(이자 및 소송비용 포함)으로 결론 난 삼성물산 관련 ISDS(투자자-국가 분쟁해결절차) 중재판정 직후 ‘승리 선언문’을 냈다. “아시아에서 주주행동주의 투자회사가 최고위층의 부패 범죄행위에 대해 승리한 최초의 분쟁 사례”라는 자랑과 함께 “한국 정부가 이번 판정을 교훈 삼아 부패와 계속 싸워나가기 바란다” 같은 주제넘은 충고까지 했다. 심지어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법무부 장관 이름까지 들먹였다. “(이들의) 검찰 재직 시절 수사로 위법이 입증된 사건.” 세계 경제 10위에 자유민주주의 동맹의 한 축을 자부하는 국가가 일개 투기자본으로부터 조롱받은 꼴이 됐다. 자기 땅에 공장을 지으라는 미국 정부 요구에 사업 기밀 공개 압박까지 받으면서도 냉가슴만 앓는 우리 기업 처지와 대비되지 않는가. 도를 넘는 방자함으로 우리 정부의 평정심을 흩트려 놓겠다는 전략인가.

 수모의 빌미를 우리가 제공한 측면이 없지 않다. 2015년 엘리엇의 삼성물산 합병 반대는 우여곡절 끝에 엘리엇의 실패로 끝나는 듯했다. 삼성물산 지분 7.12%를 사들였던 엘리엇은 손실을 본 채 한국을 떴다. 그러나 이듬해 시작된 이른바 국정농단 수사가 반전의 계기가 됐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는 ‘묵시적 청탁’ ‘제3자 뇌물’이라는 이례적 혐의가 적용됐다. 수사와 재판 결과에 시비 걸기는 힘들지만, 그런 혐의 적용이 ‘정치적’이라고 의심하는 국민도 상당수 있다. 이 수사 및 재판 결과를 엘리엇은 중재 과정에서 자신들의 논거로 이용했다. 우리 스스로 엘리엇에 무기를 쥐어준 셈이 됐다.

 PCA(국제상설중재재판소) 중재판정부의 공정성과 법 논리도 따져볼 게 수두룩하다. 문형표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 홍완선 국민연금 기금운영본부장 등이 위법 행위가 확정됐지만, 그 행위가 국민연금의 합병 찬반 의사를 굴절시켰는지는 증거가 없다. 이와 관련해 서울중앙지법은 삼성물산 개인투자자 72명이 낸 국가 상대 손배소에서 “찬반 최종 결정권은 국민연금 투자위원회에 있었다”는 1심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우리 정부가 이번 중재판정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일대 사법적 혼란이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설령 국민연금의 선택이 굴절됐다 치자. 그러나 그 굴절이 주총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는지는 또 따져봐야 한다. 2015년 5월 17일 삼성물산 주총에서 나온 합병 찬성률은 69.53%였다. 당시 주총 참석률(83.57%) 등을 고려했을 때 전체 지분의 55.71%가 찬성하면 합병 건은 통과될 수 있었다(합병 특별결의의 경우 참석주 3분의 2 찬성이 필요). 당시 국민연금의 삼성물산 지분율은 11.21%였다. 설혹 국민연금이 반대했더라도 58% 찬성률로 합병안 통과가 가능했다는 산술적 계산이 나온다. 물론 지나친 단순화일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의 위법 행위가 결정을 뒤집었고, 이 바람에 막대한 손해를 봤다는 엘리엇의 주장에 쉬 동의하기 힘든 게 사실이다.

 중재판정부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정부의 조처’로 봤다. 판정이 그대로 확정되면 기금 규모가 1000조원에 달하는 국민연금의 투자 활동에 큰 제약이 걸릴 수 있다. 자신들에 불리한 결정이 날 때마다, 혹은 관련 공무원의 개인적 비리·일탈이 벌어질 때마다 해외 투기자본이 시비 걸 가능성이 커진다.

 정부는 당연히 불복 절차에 나서야 한다. 낮은 이의제기 수용률, 소송 비용이나 이자를 따지기에 앞서 국가의 체면이 걸린 문제다. 무엇보다 우리 기업의 미래엔 아무 관심 없이 알짜배기 기업의 현재 빼먹기에만 몰두하는 해외 투기자본에 대한 강력한 대응이 필요하다. 대한민국이 벌처펀드의 봉이 돼서는 우리의 성장과 일자리가 위험해진다.

글=이현상 논설실장  그림=김아영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