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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본 자녀 앞 주먹질...이혼부부, 줄 서는 수상한 놀이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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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별거하며 이혼 소송 중이라 엄마와 지내는 초등학생 A군은 최근 이상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아빠와 단절됐다는 불안감이 원인이었다. A군 엄마는 아빠가 A군을 데려간 뒤 며칠간 잠적한 적이 있어 만남을 허락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재판부는 A군이 법원 내 면접교섭센터를 이용해 정기적으로 A군과 아빠가 단둘이 만날 수 있게 하라는 사전처분을 내렸다. 면접교섭센터는 유아용 놀이시설이 갖춰진 놀이방 형태지만 보안요원과 가사조사관, 심리상담사 등이 지켜볼 수 있는 모니터링 시스템을 갖춘 공간이다. 부부는 실랑이 끝에 센터에 신청서를 냈지만 아빠와 A군이 다시 만날 때까지는 3~4개월이 더 걸렸다. 주말에 이용하려는 대기자가 많아서다.

서울가정법원에 마련된 면접교섭실. 오른쪽 벽에 붙은 거울처럼 보이는 유리 너머에는 헤드셋 등 모니터링 시스템이 갖춰진 관찰실이 있다. 면접교섭실은 가사조사관들이 '시범 면접교섭'을 지켜보는 곳이라면, 면접교섭센터는 이보다 더 큰 규모로 마련돼 있다. 오효정 기자

서울가정법원에 마련된 면접교섭실. 오른쪽 벽에 붙은 거울처럼 보이는 유리 너머에는 헤드셋 등 모니터링 시스템이 갖춰진 관찰실이 있다. 면접교섭실은 가사조사관들이 '시범 면접교섭'을 지켜보는 곳이라면, 면접교섭센터는 이보다 더 큰 규모로 마련돼 있다. 오효정 기자

이혼 소송 도중 A군과 같은 자녀들의 목소리를 듣고 부모에게 정기적 면접교섭을 유도하는 게 업무 중 하나인 송현종 서울가정법원 가사조사관은 “면접교섭센터가 필요한 사람은 너무 많은데 여전히 시설과 인력이 부족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는 “면접교섭도 골든타임이 있다”며 “긴 대기 동안 부부 사이 오해만 커지기 때문에 지체 없이 진행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송 조사관과 같은 가사조사관들이 “면접교섭은 자녀의 정서적 안정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설득해 어렵사리 합의에 도달해도 긴 대기기간 중 감정이 상해 약속이 백짓장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이혼 2차전 위기에…법원 속 놀이방 찾는 사람들

  2021년 여성가족부 조사결과 비양육친을 정기적으로 만나는 이혼가정 자녀들은 10.2%에 불과하다. 대법원 판결문 열람 사이트에 ‘면접교섭’이라는 키워드로 형사 판결문을 검색하면 폭행 사건만 수십 건이다. 자녀 면접교섭을 위해 키즈카페 등 앞에서 만난 부모가 이런저런 이유로 다투고 폭행으로 번진 사건들이 대부분이다. 문자로 시간 장소를 정하다 욕설이 잔뜩 오가거나, 데려온 아이를 끌어당기려다 다치는 일도 흔한 일이다. 이런 갈등은 양육친의 면접교섭 기피로 이어진다.

서울가정법원 면접교섭센터 내 놀이실 2곳 중 1곳이다. 블럭이나 축구게임 등 비교적 고연령 자녀들이 좋아하는 놀이시설을 갖췄다. 오른쪽 벽면에는 모니터링용 유리가 설치돼 있고, 상담위원이 자녀와 비양육친 사이 면접교섭 과정을 관찰한 뒤 부모의 적절한 대처방법 등을 교육하고 상담한다. 오효정 기자

서울가정법원 면접교섭센터 내 놀이실 2곳 중 1곳이다. 블럭이나 축구게임 등 비교적 고연령 자녀들이 좋아하는 놀이시설을 갖췄다. 오른쪽 벽면에는 모니터링용 유리가 설치돼 있고, 상담위원이 자녀와 비양육친 사이 면접교섭 과정을 관찰한 뒤 부모의 적절한 대처방법 등을 교육하고 상담한다. 오효정 기자

 교류가 불편한 이들에게 법원 속 놀이방은 사실상 유일한 해법이다. 30평 규모의 서울가정법원 면접교섭센터 ‘이음누리’는 두 곳의 면접교섭실과 관찰실을 갖춰 부모 갈등을 최소화한다. 관찰실에선 가사조사관과 상담위원이 양 옆의 관찰용 유리를 통해 비양육친이 자녀와 어떻게 놀고 있는지 상세히 관찰한 뒤, 상담이나 교육을 진행한다. 지난달 22일 서울가정법원 면접교섭센터에서 만난 유지현 조사관은 “센터에서는 부모가 서로 마주치지 않게 통로를 구분해 갈등을 최소화하고 있다”며 “비양육친이 자녀를 몰래 탈취하지 못하게 보안요원이 대기하며 ‘화장실 가는 규칙’까지 정해져 있다”고 설명했다. 면접교섭실 두 곳은 저연령용, 고연령용으로 구분해 장난감에도 차이를 뒀다. A군 사례처럼 법원 사전처분으로 센터를 이용하는 이들도 있지만, 만 12세 미만 자녀가 있는 부부가 먼저 신청할 수도 있다. 6개월간 격주로 이용하는 것이 원칙이며 비용은 무료다.

정기적인 면접교섭은 아이의 엄마와 아빠임을 되새기는 계기로 작용해 양육비 지급 의무를 이행률을 높이는 효과도 있다. 유 조사관은 “면접교섭 초기에 직업이 없던 비양육친이 아이를 계속 만나면서 취업을 결심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송 조사관은 “면접교섭센터 같은 시설이 없던 때엔 주말마다 법원 앞마당에 비양육친이 배드민턴 라켓 같은 걸 가져와 놀고, 가사조사관은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 이들을 관찰하기도 했다”며 웃었다. 송 조사관의 건의로 서울가정법원 한켠에는 2017년 작은 놀이터가 들어섰다.

서울가정법원 한켠에 마련된 작은 놀이터. 송현종 사무관이 일본 연수 도중 아이디어를 얻어 설치를 건의했다고 한다. 여름에는 아이와 비양육친이 이 곳에서 물총놀이를 하며 면접교섭을 하기도 한다. 오효정 기자

서울가정법원 한켠에 마련된 작은 놀이터. 송현종 사무관이 일본 연수 도중 아이디어를 얻어 설치를 건의했다고 한다. 여름에는 아이와 비양육친이 이 곳에서 물총놀이를 하며 면접교섭을 하기도 한다. 오효정 기자

 문제는 수도권 지역 면접교섭센터들이 이미 포화상태라는 점이다. 이음누리는 전국 13곳 센터 중 유일하게 주말 이틀을 다 문을 여는 곳이다. 2014년 11월 문을 연 뒤 이 곳에는 지난해까지 1010건 넘는 신청이 접수됐고 7059회 이상의 면접교섭이 여기서 진행됐다. 법원행정처는 2025년까지 전국 면접교섭센터를 18곳으로 늘린다는 계획이지만 이것만으로 불충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내년 초 경기도 구리시에 문을 여는 광역면접교섭센터 프로그램 구성작업에 참여하고 있다는 송 조사관은 “면접교섭 특성상 부모들은 주말 이용을 선호하지만, 주말 이틀을 다 운영할 만큼의 가사조사관 인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가사조사관은 이혼 사건뿐 아니라 소년 사건, 아동학대 사건, 후견 사건 등도 담당하는데, 현재 전국 총 221명 뿐이다. 송 조사관이나 유 조사관처럼 사회복지학이나 심리학 등 인간관계학을 석사 이상 전공한 전문 가사조사관은 197명에 불과하다.

학계에서는 이들이 최소 450명 이상은 필요하다고 본다. 전국 53개 가정(지방)법원 및 지원 가운데 7개 법원은 전문조사관이 아예 없고, 23개 법원에는 전문조사관 혼자 근무하거나 순회 근무자가 들를 뿐이다. 송 조사관은 “현재로선 조사관들 욕심만큼 당사자들을 충분히 만나게 할 수 없는 여건”이라며 “인력이 충원되면 현재는 가사조사관이 개입할 수 없는 협의이혼한 부모의 자녀들의 면접교섭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부모 손절’에 상처받는 아이들 

 서울가정법원 송현종(왼쪽) 조사관(사무관), 유지현 조사관이 22일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 하고 있다. 송 조사관은 2001년부터, 유 조사관은 2015년부터 가사조사관 일을 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서울가정법원 송현종(왼쪽) 조사관(사무관), 유지현 조사관이 22일 서울가정법원 앞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 하고 있다. 송 조사관은 2001년부터, 유 조사관은 2015년부터 가사조사관 일을 하고 있다. 김종호 기자

 두 조사관은 이혼을 앞둔 부부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으로 “자녀에게 솔직하라”는 말을 꼽았다. 유 조사관은 “자녀들이 스스로를 부모 결정에 의해 휘둘리는 피동적 존재로 인식하다 보면 굉장히 냉소적으로 변한다”며 “자녀 마음을 들어주는 시간을 충분히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송 조사관도 “자녀들이 유튜브 등에서 이혼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얻고 상처 받는 경우도 많다”며 “자녀에게 비양육친에 대해 험담하는 경우가 많은데, 자녀가 비양육친과 정서적 유대를 단단하게 쌓아야 이혼이라는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런 자녀들을 위로하고 교육하는 책자〈언제나 사랑해〉를 직접 만들기도 했다. “부모님에게 새로운 이성 친구가 생겼을 때”, “친구들한테 알려질까 봐 부끄러울 때” 등 고민에 대한 답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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