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생긴 춘향" 논란에 놀란 전주시 "견훤 영정 밑그림 비공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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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 이미지.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견훤 이미지. 일러스트= 김지윤 기자

“내년 6~7월 초안 확정…문체부 심의 요청” 

약 1100년 전 후백제 왕도였던 전북 전주시가 견훤왕의 표준 영정 제작에 나섰다. 그러나 영정 밑그림이 나와도 정부 인증을 받을 때까진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 지난 5월 남원시가 공개한 새 춘향 영정을 두고 ‘못생겼다’ ‘나이 들어 보인다’ 등 외모 논란이 일자 보안에 더욱 신경을 쓰는 모양새다.

전주시는 1일 “견훤왕 선양 사업으로 표준 영정을 제작하고 있다”며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에 신청할 영정 초안을 마련하기 위해 1억5000만원 규모의 학술 용역을 발주했다”고 밝혔다. 신라 호족 출신인 견훤(867~936년)은 900년 지금의 전주인 완산주에 후백제를 세웠다.

전주시 관계자는 “내년 6~7월 영정 초안이 확정되면 문체부 산하 영정·동상심의위원회에 심의를 요청할 예정”이라며 “영정 완성까지 학술 용역 외 1억~1억5000만원의 제작비가 추가로 들 것으로 예상한다”고 했다. 영정은 가로 1.5m, 세로 2.2m 크기로 제작할 방침이다.

지난해 6월 17일 전주역사박물관에서 전주시 등이 주최한 '후백제 견훤대왕 표준 영정 제작을 위한 학술 세미나'에서 박현숙 고려대 교수가 발표한 '정부 표준 영정의 사회적 의미와 제작 절차' 관련 자료. [사진 전주시]

지난해 6월 17일 전주역사박물관에서 전주시 등이 주최한 '후백제 견훤대왕 표준 영정 제작을 위한 학술 세미나'에서 박현숙 고려대 교수가 발표한 '정부 표준 영정의 사회적 의미와 제작 절차' 관련 자료. [사진 전주시]

“폭군 등 왜곡된 인식 바로잡아야”

전주시가 1000년 전 죽은 왕의 초상화를 그리려는 까닭은 뭘까. 후백제와 견훤왕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아 전주의 문화적 고유성과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겠다는 게 시가 밝힌 표면적 이유다.

실제 고려 중기 문신인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고려를 건국,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과 달리 후고구려(태봉)와 후백제를 세운 궁예와 견훤은 폭군으로 규정했다. 특히 견훤에 대해선 “임금과 신하를 마구 죽이기를 마치 짐승 사냥하듯이, 풀 베듯이 하였으니 실로 천하에서 가장 흉악한 자였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최근 학계에선 “새 시대를 열었던 혁명가로서 정당한 평가가 긴요하다”는 반론도 만만찮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융합고고학과 교수는 “후백제 역사는 비록 반세기에 불과했지만, 혈연에 기반한 신라 사회를 해체하고 참여와 기회의 폭이 넓어진 중세 사회로 넘어가는 동인을 마련했다”며 “(견훤왕이) 민족적으로 추앙받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강원도 철원군이 지난해 11월 8일 민통선 내 태봉국 궁예왕 역사공원 사당에 봉안한 궁예왕 영정. 철원군은 2017년부터 철원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궁예왕 표준 영정 제작을 추진했고, 현재 문체부 심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 철원군]

강원도 철원군이 지난해 11월 8일 민통선 내 태봉국 궁예왕 역사공원 사당에 봉안한 궁예왕 영정. 철원군은 2017년부터 철원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궁예왕 표준 영정 제작을 추진했고, 현재 문체부 심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 철원군]

“1조5000억 ‘왕의 궁원’ 프로젝트 시발점”

전주시는 “2017년부터 견훤과 비슷한 평가를 받는 궁예의 표준 영정 제작을 추진한 강원도 철원군을 벤치마킹했다”고 했다. “후삼국 시대를 연 세 인물 중 왕건은 1999년 표준 영정이 제작됐고, 궁예 영정도 정부 지정만 앞뒀는데 견훤만 없다”면서다. 철원군은 지난해 11월 8일 권오창 화백이 그린 궁예왕 영정을 민간인출입통제선(민통선) 내 태봉국 궁예왕 역사공원 사당에 봉안했다. 군 관계자는 “문체부 심의는 마쳤고, 표준 영정 지정만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전주시는 견훤왕 표준 영정 지정을 민선 8기 우범기 시장 핵심 공약인 ‘왕의 궁원’ 프로젝트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20년간 1조5000억원을 들여 동고산성·전라감영 등 후백제부터 조선에 이르는 전주 문화유산을 역사·관광 콘텐트로 만드는 사업이다.

앞서 전주시는 2021년 경북 문경·상주시 등 6개 기초자치단체와 손잡고 ‘후백제문화권지방정부협의회’를 발족했다. 이들 지자체 건의로 지난 1월 개정된 ‘역사문화권 정비에 관한 특별법’엔 후백제가 포함됐다. 전주시는 이를 발판 삼아 경주·부여·공주·익산처럼 국가 고도(古都)로 지정받는 절차도 밟고 있다.

우범기 전주시장이 지난 4월12일 후백제 유적이 남아 있는 전주 동고산성에서 본인 핵심 공약인 '왕의 궁원'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전주시]

우범기 전주시장이 지난 4월12일 후백제 유적이 남아 있는 전주 동고산성에서 본인 핵심 공약인 '왕의 궁원'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전주시]

학계 “호랑이상 60세 왕”

전주시는 정부로부터 표준 영정 지정을 받기 위해 견훤왕에 대한 학술 조사를 꼼꼼히 하고 역사적 기록도 최대한 반영할 계획이다. 기존 견훤왕 초상화 대부분은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견훤 역을 맡은 서인석 배우를 닮았다고 한다.

그나마 가상 인물인 춘향과 달리 견훤왕은 “호랑이 젖을 먹었다” “장성하면서 체격과 용모가 뛰어나게 기이했다” 등 기록이 남아 있다. 그의 전성기는 왕건과 대구 팔공산 일대에서 벌인 일명 ‘공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927년이 꼽힌다. 이에 학계에선 “호랑이상에 형형한 눈빛을 지닌 60세 왕의 모습을 그려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전주시는 후삼국 시대 복식·미술 자료와 전문가 고증을 거쳐 표준 영정 초안을 만든 뒤 화백을 선정할 예정이다. 견훤 후손인 전주 견씨 10~20명의 생김새도 참고하기로 했다. 그러나 영정 초안에 대해선 비공개 방침을 세웠다. 시 관계자는 “그림이 공개되면 의견이 쏟아질 테고, 이게 심의 위원들에게 압박으로 작용해 표준 영정으로 지정받는 데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했다.

박현숙 고려대 교수가 지난해 6월 전주에서 열린 학술 세미나에서 공개한 문무왕·대조영·장보고·최치원 등 표준 영정. [사진 전주시]

박현숙 고려대 교수가 지난해 6월 전주에서 열린 학술 세미나에서 공개한 문무왕·대조영·장보고·최치원 등 표준 영정. [사진 전주시]

박현숙 고려대 교수가 발표한 표준 영정 작가 현황. 고조선 단군부터 윤봉길 등 독립운동가까지 99명의 표준 영정이 제작됐다. 1978년 지정된 유관순 영정은 고증 논란으로 2007년 새 그림으로 교체됐다. 김정희·황희·이성계 등 7명은 별도 제작 없이 당대 작품이 표준 영정으로 지정됐다. 역대 가장 많은 표준 영정을 그린 작가는 권오창 화백이다. 15명을 그렸다. [사진 전주시]

박현숙 고려대 교수가 발표한 표준 영정 작가 현황. 고조선 단군부터 윤봉길 등 독립운동가까지 99명의 표준 영정이 제작됐다. 1978년 지정된 유관순 영정은 고증 논란으로 2007년 새 그림으로 교체됐다. 김정희·황희·이성계 등 7명은 별도 제작 없이 당대 작품이 표준 영정으로 지정됐다. 역대 가장 많은 표준 영정을 그린 작가는 권오창 화백이다. 15명을 그렸다. [사진 전주시]

정부, 1973년 표준 영정 도입

표준 영정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증한 위인의 초상화를 말한다. 표준 영정 제도는 영정 난립을 막기 위해 1973년 도입됐다. 한국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 중 ‘민족적으로 추앙받고 있는 선현’이 대상이다. 역사·미술·복식 등 전문가 15명 이내로 구성된 문체부 산하 영정·동상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문체부 장관이 지정한다.

김현철(64) 화백이 그린 새 춘향 영정. 지난 5월 25일 전북 남원시 광한루원 춘향사당에 봉안됐다. 외모 논란에 대해 김 화백은 "시대가 바뀌면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진다"며 "모델같이 '예쁜 춘향'보다 인격체로서 '당당하고 주체적인 춘향'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 김현철 화백]

김현철(64) 화백이 그린 새 춘향 영정. 지난 5월 25일 전북 남원시 광한루원 춘향사당에 봉안됐다. 외모 논란에 대해 김 화백은 "시대가 바뀌면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진다"며 "모델같이 '예쁜 춘향'보다 인격체로서 '당당하고 주체적인 춘향'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사진 김현철 화백]

“표준이 뭐냐” vs “관광·문화 활성화” 

표준 영정을 둘러싸고 고증 문제와 화가 친일 경력 등 논란이 끊이지 않자 ‘폐지론’도 나온다. “사람마다 의견과 취향은 천차만별인데, 정부가 일종의 상상화에 ‘표준’ 지위를 부여하는 게 맞냐”는 문제 제기다.

문체부 내에서도 고민이 깊다. 영정·동상심의위 위원인 박현숙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관광·문화 산업 활성화를 위해 지자체 요구를 반영해 표준 영정 지정을 활성화하는 게 좋을지, 역사적 근거가 희박한 경우 ‘상상의 얼굴’이 될 우려가 있으므로 영정 지정을 숙고할지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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