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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 “일본에 중국 바람 일으켜라” 상하이발레단 일 공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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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6호 29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781〉

생면부지의 발레리나들과 함께한 쑨핑화. [사진 김명호]

생면부지의 발레리나들과 함께한 쑨핑화. [사진 김명호]

중공(중국공산당)은 신중국(중화인민공화국) 선포 후 소련과 우호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미국 눈치 보며 대만의 중화민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중화민국은 일본에 전쟁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20년 가까이 밀월관계를 유지했다. 중·소관계가 악화되자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았다. 일본도 대륙과 관계 정상화를 추진했다. 그간 외교관계는 없어도 문화교류는 활발했다. ‘랴오청즈(廖承志·요승지) 사무실 도쿄연락처’와 일본이 베이징에 설립한 ‘다카사키 다스노스케(高崎達之助) 사무실 베이징 연락 사무소’라는 기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오 “몰려오는 대화 불길 맹렬” 메시지

상하이발레단 단장 쑨핑화(가운데)를 직접 만나 중국 방문의사를 밝힌 다나카(오른쪽). 1972년 8월 15일 오후, 도쿄 제국호텔. [사진 김명호]

상하이발레단 단장 쑨핑화(가운데)를 직접 만나 중국 방문의사를 밝힌 다나카(오른쪽). 1972년 8월 15일 오후, 도쿄 제국호텔. [사진 김명호]

‘도쿄연락처’와 ‘베이징 연락사무소’는 수교가 없던 양국관계를 민간교류에서 반관반민(半官半民) 단계로 격상시키는 역할을 했다. ‘중국 대외우호협회’ 회장도 겸한 ‘도쿄연락처’ 수석대표는 아무나 가는 자리가 아니었다. 위상이 해외주재 대사 이상이었다.

‘핑퐁외교’로 시작된 미·중관계의 파빙(破氷)에 일본은 민감하게 대응했다. 일·중관계 회복을 요구하는 정당과 사회단체의 집회와 시위가 줄을 이었다. 사회당과 공명당, 민사당도 중국을 방문,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자민당과 야당의원 300여명은 ‘일·중수교 촉진 의원연맹’까지 결성했다. 재계와 문화계는 말할 것도 없었다.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랴오청즈를 불렀다. “일본에 중국 바람 일으킬 필요가 있다.” 랴오도 동의했다. 전 ‘도쿄연락처’ 수석대표 쑨핑화(孫平化·손평화)에게 지시했다. “일본 언론계 인사들을 접촉해라.” 1972년 7월 10일 밤, 일본의 일·중문화교류협회와 아사이신문(朝日新聞)의 초청에 응한 상하이발레단 208명을 태운 일본 항공기 2대가 하네다 공항에 착륙했다. 야밤에 내리는 보슬비도 일본의 중국 선풍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환영객 2000여명이 몰려와 극성을 떨었다. 7월 12일, 다나카 내각 출범 1주일 후, 아사이신문이 주관한 상하이발레단 환영연도 가관이었다. 전국에서 운집한 각계인사 2000명이 쑨핑화의 입을 주목했다. 쑨도 참석자들의 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우리가 온 이유는 단순한 문화교류 차원이 아니다. 정상적인 관계 회복 원망(願望)하는 양국 국민의 우호를 다지기 위해서다.”                                                             14일 첫 번째 공연에서 관객들은 발레무 ‘백모녀(白毛女)’에 열광했다. 단장 쑨핑화의 기자회견이 주목을 끌었다. “나는 ‘백모녀’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없다. 중국 특유의 발레무에는 백지나 다름없다. 공연에 관한 질문은 삼가해 주기 바란다.” 기자들은 “뭐 저런 사람이 다 있느냐”며 어이가 없었다. 미모의 여기자가 온 이유를 물었다. 쑨은 노련했다. 실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옛 친구들 두루 만나고, 새로운 친구도 만나러 왔다. 1개월간 전국 순회공연하며 새 친구의 연락오기를 기다리겠다.” 쑨이 말한 새 친구는 일본 총리 다나카를 의미했다.

다나카, 저우언라이의 방중 요청 수락

발레외교에 분주한 일본 발레리나와 상하이발레단 단원들. 1972년 7월 23일, 시즈오카. [사진 김명호]

발레외교에 분주한 일본 발레리나와 상하이발레단 단원들. 1972년 7월 23일, 시즈오카. [사진 김명호]

배경 설명이 필요하다. 발레단 출발을 앞두고 저우언라이와 랴오청즈는 쑨핑화를 단장에 임명했다. 쑨에게 주지시켰다. “너는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갔다. 우수한 대학 마치고 체류기간도 길었다. 그간 발레는 이해하지 못해도 일본문화를 이해하고 일본인 홀리는 재주가 탁월했다. 일본에 보내는 이유는 다나카의 중국 방문을 앞당기기 위해서다. 일본정부 안에는 우익세력이 만만치 않다. 10년 전 사회당 위원장이 중국과 관계 정상화 촉구하는 연설하다 무대에 뛰어오른 우익분자의 칼에 죽은 일이 있었다. 다나카는 발레단이 보내는 메시지에 무반응으로 일관할지도 모른다. 다나카를 만나겠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라. 침묵을 깨고 나타날 때까지 그치지 마라. 발레외교로 핑퐁외교 못지않은 성과를 기대한다.” 외상 오히라나 총리 다나카 면담에 필요한 정상회담 의제와 마오쩌둥의 생각도 알려줬다. 쑨이 발레에 문외한이라며 반대하는 사람에겐 호통을 쳤다.

1972년 9월 25일 오전 11시 베이징공항에 도착한 다나카 일본 총리(오른쪽). [사진 김명호]

1972년 9월 25일 오전 11시 베이징공항에 도착한 다나카 일본 총리(오른쪽). [사진 김명호]

일본 언론이 상하이발레단과 쑨핑화의 동향, 일본인들의 반응을 연일 대서특필했다. 외상 오히라는 쑨이 중국 최고위층의 특사라고 직감했다. 직접 쑨을 만났다. “나와 다나카는 일심동체(一心同體)의 맹우다. 외교 문제는 내게 전권을 부여했다. 양국관계를 정상화시킬 시기가 도래했다.” 쑨도 평소 마오쩌둥의 구상을 전달했다. “상대가 오면 대화를 나누고 싶다. 말로 묵혔던 체증이 풀려도 좋고, 안 풀려도 좋다. 몰려오는 불길이 맹렬하다. 중요한 물건은 빨리 꺼내야 한다. 바람 그치기 기다렸다간 모두 재가 된다. 주석은 다나카 총리와 오히라 외상이 베이징에 와서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하기를 희망한다.” 8월 11일, 오히라가 다시 쑨을 접견했다. “발레단 귀국 전 다나카 총리가 직접 쑨 선생에게 중국방문 의사를 전달하고 싶어한다.”

8월 15일, 발레단 귀국 하루 전 다나카가 오히라와 관방장관 니카이도를 대동하고 제국호텔 쑨핑화의 숙소를 방문했다. 쑨에게 정식으로 저우언라이 총리의 중국방문 요청 수락을 전달했다. 쑨이 9월 25일에서 30일까지가 좋다고 하자 그것도 수락했다.

다나카는 저우언라이에게 행동으로 메시지를 보냈다. 일본 항공기 타고 귀국하는 상하이발레단은 홍콩을 경유하지 않고 상하이로 직행했다. 저우도 다나카에게 메시지를 잊지 않았다. 홍차오 공항에 3000명을 동원해 발레단의 귀국을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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