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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론

을지로~동대문, 도심 제조업 단지 가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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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홍성용 전 서울시 마을 건축사

홍성용 전 서울시 마을 건축사

1960년대 말까지 미국 뉴욕은 미래가 없어 보이는 도시였다. 정확히 말하면 맨해튼이 그랬다. 산업 구조와 사회 경제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뉴욕은 급등하는 범죄율과 도시 노후화로 기업들이 외곽으로 이전하고 도시 경쟁력은 떨어졌다. 지금의 뉴욕을 아는 이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과거다.

그렇다면 뉴욕의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나. 1980년대 뉴욕은 대대적인 체질 개선에 나서면서 지식 기반의 산업구조를 도입했다. 흥미로운 것은 ‘도시 제조업’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뉴욕 맨해튼에서 패션 산업은 제조부터 유통까지 일관된 체제를 형성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오늘날 뉴욕은 글로벌 패션 시장의 주요 거점으로 인정받는다. 도시의 삶과 죽음 즉, 생산·소비·유통의 순환구조가 완성된 몇 안 되는 곳이 뉴욕이다.

패션산업으로 부활한 맨해튼
제조업과 문화 어울린 롯폰기
서울도 산업생태계 만들어야

김지윤 기자

김지윤 기자

뉴욕에 주목하는 이유는 서울도 생산·유통·소비의 전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접근이 편한 도심에 거대한 산업이 존재한다. 을지로의 인쇄업부터 동대문의 패션 산업, 그리고 연관된 각종 기계와 부속 산업들은 제조부터 유통까지 잘 갖췄다. 이렇게 압축되고 일목요연하게 도심 제조업을 갖춘 도시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그렇기에 도심 거점 생산 산업을 쉽게 포기하면 안 된다. 문제는 이들 지역이 도시구조나 건축적으로 극히 노후하고 열악하다는 점이다. 주말이면 도심 공동화를 초래하고, 노후한 도시구조가 서울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부분도 있다.

대안은 없을까. 우리는 옛 구로공단 지역을 ‘가산 디지털 첨단 산업단지’로 전환한 성공 경험이 있다. 가산 디지털 단지에 가보면 첨단 도시 이미지로 가득하다.

이를 도심 제조업 지역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 인근 지하에 주유소가 있다. 문화재와 기존 도시 구조로 꽉 짜인 구도심의 지상에 이런 시설을 두지 못하자 지하에서 가능성을 찾았다. 그렇다면 도심제조 시설들을 지하에 둘 수는 없을까. 인쇄업에 필요한 중장비 생산 시설들을 지하에 배치하면 안 될까. 성수동의 지식산업센터 몇 곳에는 인쇄기업들이 지하에 들어가 있다. 가능성이 충분하다. 현행법상 지식산업센터는 준공업지역이나 산업단지에 건축이 가능하다. 지자체 권한으로 지구단위계획으로도 할 수 있다.

을지로부터 동대문 일대까지를 도심 제조업 특화 산업 지역으로 선정해 입체적인 도심형 지식산업센터 타운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건축적 가능성을 일본의 대규모 도시 재생 사업 지역이나 독일 하펜시티 등에서 볼 수 있다.

도쿄 긴자에 이웃한 시오도메는 블록 중앙에 거대한 선컨(Sunken) 광장을 설치해 지하 2층까지 햇볕이 들도록 디자인했다. 이렇게 건축사들의 아이디어를 적용하면 지식산업센터는 얼마든지 새로운 형태로 만들 수 있다.

도쿄의 변화에 민간 디벨로퍼(개발자)도 한몫했다. 롯폰기힐스가 대표적 공간이다. 약 400여 작은 필지의 지주들을 설득하는 데 10여년을 보냈고, 그동안 잘 계획된 설계로 단 2~3년 만에 준공했다.

2003년 개장한 롯폰기힐스의 성공은 단지 건물 몇 개의 하드웨어에 있지 않다. 24시간 작동하는 다양한 공간 프로그램과 운영에 있다. 방송사·호텔과 민간 미술관을 지었고, 에도(江戶)시대의 정원도 복원했다. 무엇보다 누구나 지나갈 수 있는 보행과 이동 공간을 열어둔 점이 눈에 띈다. 한 곳에서 생산·유통·소비가 모두 이뤄진다. 이것이 성공 포인트다.

첨단 물류 시설이 블록 전체를 이동하고, 지역별 허브를 두고 시스템을 만든다면 서울형 미래 도심 제조업이 가능하다. 여기에 일정 비율의 청년 주거시설 등 다양한 도심 주거 시설을 갖추면 15분 도심 생활 생태계를 구축할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개별 필지가 아닌 블록 전체를 건축적으로 계획해야 한다. 특별건축구역 지정의 법체계도 우리는 이미 갖고 있다. 구도심 을지로에서 동대문까지 21세기형 첨단 도시제조업 생태계로 비전을 제시할 수 있고,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그것이 미래의 자산이기도 하다. 올해는 단순한 구도심 부활이 아닌 세계적인 도시 서울을 위한 더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도시구조로 전환할 적기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홍성용 전 서울시 마을 건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