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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정제원의 시선

국기원에는 비가 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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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제원 기자 중앙일보 문화스포츠디렉터
정제원 스포츠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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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권도 사범 도영수 관장을 만난 건 2007년 2월이었다.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 자리 잡은 ‘영 태권도스쿨’에서다. 미국 사람들은 그를 ‘마스터 도(Master Do)’라고 불렀다. 재미교포 마스터 도는 스포츠 경기를 취재하기 위해 마이애미를 찾은 낯선 기자를 반갑게 맞이해줬다. 마이애미에 머문 닷새 동안 그의 미국 개척사를 들었다.

1970년대 베트남전에 참전했다가 귀국한 청년 도영수는 청운의 뜻을 품고 미국행 비행기에 오른다. 그의 손엔 태권도복 한 벌과 달랑 500달러뿐. TV에 나온 화려한 경치에 반해 가본 적도 없고, 연고도 없는 마이애미행을 결심했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도장 깨기’에 나선다. 주변의 가라테 도장을 찾아가 일대일 대결을 신청했다. 그리고는 연전연승을 거두면서 이름을 알렸다.

지구촌 2억명 태권도의 본산
폭염 속에도 에어컨 안 나와
종주국 흔들리며 중국 급부상

천신만고 끝에 마이애미에 태권도장을 차렸다. 마스터 도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제자가 늘기 시작했다. 그렇게 태권도장을 운영하기를 30여년. 그가 가르친 제자들은 성인이 돼서 미국 전역에 자리 잡았다. 경찰관과 운동선수, 사업가, 스포츠 에이전트 등 제자들의 직업도 다양했다. 그 중엔 스포츠 전문잡지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표지를 장식했던 수퍼 에이전트 드류 로젠하우스도 있었다. 마스터 도는 느닷없이 로젠하우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드류, 한국에서 손님이 오셨어. 내일 도장으로 올 수 있나.”

“옛, 썰!”

이튿날 아침, 도장에 들어선 로젠하우스는 스승 앞에서 대뜸 무릎부터 꿇었다. 그리고는 기자에게 자신이 쓴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제목은 『상어는 결코 잠들지 않는다(A shark never sleeps)』.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에이전트인 자신을 상어에 비유했다. 첫 페이지부터 ‘Master Do Young Soo’라는 문구가 선명하다.

“마스터 도는 저희 형제를 혹독하게 훈련시켰어요. 태권도를 통해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헤쳐나가는 법을 가르쳐 주셨지요. 거짓말을 하면 발차기 횟수가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 호된 기합을 받는 건 다반사였지요. 스승님이 가르쳐주신 태권도 스피리트(정신)를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마스터 도가 들려준 미국 개척 스토리는 강렬했다. 그의 이야기는 태권도 신화처럼 들렸다.

서울시 강남구 테헤란로7길 32. 지구촌 2억 명 태권도 가족의 구심점을 자처하는 국기원의 주소다. 그런데 국기원에는 비만 오면 물이 줄줄 샌다. 수도꼭지에선 녹물이 나온다. 수백 명이 모이는 행사가 수시로 열리는데 에어컨이 나오지 않는다. 배관이 낡았기 때문이다. 수련생들은 땀을 뻘뻘 흘린 뒤에도 샤워는 꿈도 못 꾼다. 겨울에는 보일러가 꺼지기 다반사다. 1972년 국기원을 지은 지 30년이 넘도록 보수 공사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일이다. 승단 심사비 등으로 적잖은 수입을 올리고 있지만, 리모델링 예산을 편성한 적이 없다. 국기원 건물은 서울시, 땅은 강남구 소유 재산인데 차일피일 미루다 이런 일이 벌어졌다.

정부와 태권도인들이 자초한 측면도 있다. 국기원은 한때 파벌과 비리의 온상으로도 불렸다. 승단 심사, 단증 발급을 둘러싸고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서슬이 퍼렇던 군사정권 시절, 태권도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강제로 배워야 하는 필수 종목에 가까웠다. 군대에 가면 누구나 다리를 찢어가면서 강제로 1단을 따야 했다. 태권도의 일사불란한 동작과 격파 시범은 군사정권 시절의 제식훈련이나 교련 수업과 오버랩된다. 그러는 사이 국민은 태권도를 바라보며 위화감을 느끼게 됐다. 태권도에 정치가 개입하고, 태권도가 정권의 파수꾼 역할을 하면서 정체성이 흔들렸다.

태권도는 과연 우리에게 무엇인가. 격투기인가, 호신술인가. 올림픽 종목이니까 스포츠라고 해도 될까. 태권도 진흥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태권도는 대한민국의 국기(國技)다. 그런데 요즘은 성장기 어린이들의 발육을 돕기 위해 학원에서나 가르치는 체육 종목의 하나로 추락할 위기다.

종주국의 위상이 흔들리는 사이 중국이 급부상했다. 중국 전역에는 현재 10만 개의 태권도장이 있다. 중국 내 태권도 인구는 5000만 명을 넘어섰다. 김치를 파오차이(泡菜)라고 부르듯 중국은 태권도를 자기네 것이라고 우길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런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중국의 ‘태권도 동북공정’이다. 이들은 서울에 있는 세계태권도연맹(WT)의 본부를 언제든지 중국 본토로 옮기라고 권유하고 있다. (유도는 일본이 종주국이지만, 국제유도연맹은 스위스 로잔에 있다) 태권도 종주국에 걸맞은 위상 재정립이 필요하다. 국기원을 이대로 방치하는 건 정답이 아닐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