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세계 '조각의 성지'에서 '마에스트로'라 불리는 한국 조각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서울 논현동 스텔라갤러리에서 7월 23일까지 개인전을 여는 박은선 조각가.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논현동 스텔라갤러리에서 7월 23일까지 개인전을 여는 박은선 조각가.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탈리아 피에트라산타에서 활동하는 조각가 박은선(58)씨가 서울 논현동 스텔라 갤러리에서 개인전(7월 23일까지)을 열고 있다. 국내에서 여는 5년 만의 전시로, 박씨는 이번 전시에서 '디퓨지오네(Diffusione, 확산)'를 주제로 신작 15점을 비롯해 총 47점의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서울 스텔라갤러리 개인전 #신작 15점 포함 47점 전시 #伊 피테트라산타서 30년 #25년 신안에 조각미술관 #마리오 보타와 협업 중

박씨가 활동하고 있는 피에트라산타는 이탈리아 토스카나 주에 자리한 도시로, 세계에서 '조각의 성지(聖地)'라 불린다. 르네상스 시대 천재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활약했고, 헨리 무어, 호안 미로, 살바도르 달리 등 전설적인 거장들이 작업한 곳으로 유명하다.

1993년부터 이탈리아에서 거주해온 박씨는 지금 그곳에서 '마에스트로'라 불린다. 2018년 피에트라산타 시가 주는 최고 조각상을 한국인 최초로 수상했고, 지난해 6월 새로 만들어진 고속도로 진입 교차로엔 그가 제작한 11m 높이의 대형 대리석 조각 '무한 기둥(Colonna Infinita)'이 세워졌다. 또 같은 해 8월 세계적인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64)의 요청으로 보첼리가 자신의 고향 라이아티코에서 연 콘서트 무대에 대표작 '무한 기둥'을 선보였다. 조각의 본고장에서 그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박씨는 현재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마리오 보타(80)와 함께 신안군 자은도 조각미술관 '인피니또 뮤지엄' 건립에 참여하고 있다. 신안군이 건립하는 이 조각미술관은 보타가 설계를 맡았으며, 박씨의  작품 다수가 소장될 예정이다. 최근 한국을 방문해 '관객과의 대화'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늘 낭떠러지 끝에 있다고 느끼며 일해왔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순간에 꼭 계단이 하나, 둘 나타나 나를 버티게 했다"며 "지금은 제가 '이탈리아에서 가장 성공한 조각가'로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박은선 조각가의 작품에는 마치 바람길처럼 몸체에 균열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스텔라갤러리

박은선 조각가의 작품에는 마치 바람길처럼 몸체에 균열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스텔라갤러리

박은선 조각가는 다른 색의 돌을 얇게 잘라 켜켜이 쌓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박은선 조각가는 다른 색의 돌을 얇게 잘라 켜켜이 쌓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2014년 로마 유적지에서 열린 전시를 찾은 건축가 마리오 보타(오른쪽)과 박은선 조각가. 박은선 제공

2014년 로마 유적지에서 열린 전시를 찾은 건축가 마리오 보타(오른쪽)과 박은선 조각가. 박은선 제공

 2016년 피렌체 미켈란젤로 광장( Piazzale Michelangelo) 전시. 박은선 제공

2016년 피렌체 미켈란젤로 광장( Piazzale Michelangelo) 전시. 박은선 제공

지난해 6월 피에트라산타 고속도로 진입 교차료에 세워진 박은선 조각가의 '무한기둥'. 박은선 제공

지난해 6월 피에트라산타 고속도로 진입 교차료에 세워진 박은선 조각가의 '무한기둥'. 박은선 제공

 지난해 8월 세계적인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 콘서트 무대를 장식한 박은선의 '무한기둥'. 박은선 제공

지난해 8월 세계적인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 콘서트 무대를 장식한 박은선의 '무한기둥'. 박은선 제공

스스로 '성공한 조각가'라고 말했다.   
피에트라산타는 세계적인 조각가들이 다 몰려 있는 도시다. 거기서 30년간 조각가로 지금까지 일하고 있으면 성공한 것 아닌가(웃음). 제가 그 누구보다 유명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도 제가 그곳에서 행복하게 작업하고 있다는 의미다. 
조각가로서 이 자부심은 어디에서 오나.  
사람들은 성공했다고 하면 돈을 굉장히 많이 벌었을 거라고 생각하더라(웃음). 돈은 그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지난 20년간 이탈리아의 정말 많은 멋진 장소에서 전시를 열 수 있었고, 유럽 곳곳에서 개인전을 꾸준히 해왔다. 다시 말하지만, 아무 걱정 없이 지금 내가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하는 게 바로 성공이 아니겠나. 

박씨는 전남 목포 출신으로 경희대 조소과,이탈리아 카라라 국립예술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피에트라산타에서 활동해왔다. 2007년 시의 제안을 받아 연 개인전을 기점으로 곳곳에서 '러브콜'이 이어졌다. 2014년 로마의 유서 깊은 고대 유적지에 자리한 포리 임페리알리 미술관에서 대규모 야외 조각전을 열었다. 또 2016년엔 피렌체 시 초청으로 미켈란젤로 광장 등 도시 곳곳에서 14점의 조각을 석 달간 전시했다. 현재 이탈리아와 유럽 각 도시에는 그의 공공 조형물이 20여 점 설치돼 있다.

박씨의 돌 조각은 줄무늬 기둥, 구, 정육면체 등에 두 가지 색이 교차하고, 덩어리에 금이 간 듯이 깨진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표현한 균열이 특징이다.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한 형태의 '무한 기둥'이다. 서울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 야외에도 설치돼 있으며, '무한 기둥'은 고대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연상케 하는 이 기둥은 창공을 향해 상승하는 이미지다.

"각기 다른 두 가지 색의 대리석을 수평으로 잘라 켜켜이 쌓아 올리며 작업한다"는 그의 작품엔 일부러 깨뜨려 만든 돌들의 거친 표면이 바람길처럼 틈이 나 있다. "그 틈과 균열이 내겐 숨통"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깨뜨린 돌을 쌓아 완성한 조각이라니.
저도 예전엔 돌 조각하면 덩어리 안에서 형태를 찾아내야 한다고 배웠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내가 왜 교과서를 따라야 하지?'라는 의문이 들더라. 그래서 돌을 앞에 놓고 모두 깨버리고, 깨진 조각을 가지고 조립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만의 작품을 만들기 시작한 것 같다. 
서울 논현동 스텔라갤러리에서 신작 앞에 선 박은선 조각가.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논현동 스텔라갤러리에서 신작 앞에 선 박은선 조각가.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박은선 조각가가 팬데믹 시기에 시작한 새 연작 '확산'.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박은선 조각가가 팬데믹 시기에 시작한 새 연작 '확산'.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번 전시에서 그는 새 연작 '확산'을 국내에선 처음으로 선보였다. '확산'은 매끈한 대리석 구(球)가 마치 포도알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색색의 빛을 내는 형태다. "내부를 모두 파내 8㎜ 두께로 만든 뒤 안에 1, 2와트 LED 등을 달아 완성"한 둥근 모양의 돌들은 각기 돌 자체의 고유한 색으로 빛을 뿜어낸다. "빛을 내는 각각의 구를 사람이라 생각했다"는 그는 "코로나 때 이 작업을 시작했다. 서로 몸을 맞대고 밝게 빛을 내는 작품을 통해 '연대'와 '희망'의 얘기를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건축가 마리오 보타와 어떻게 협업하게 됐나.
2014년 로마 유적지에서 열린 제 전시에 그가 직접 찾아왔다. 제가 좋아하는 건축가와 기회가 되면 어떤 형태로든 협업하고 싶다고 생각해왔는데 뜻밖에 그 희망을 빨리 이루게 됐다.  

보타는 내년에 피에트라산타에 개관할 '박은선미술관'(가칭)도 설계했다. 박씨는 "누구보다 제 작품을 잘 알고 있는 세계적인 건축가와 함께 이탈리아와 한국 두 곳에서 함께 작업하게 돼 큰 영광"이라고 말했다.

작업을 계속해온 비결은. 
30년 동안 달리기를 해왔다, 최근 몇 달 동안 너무 바빠서 쉬었지만, 그 전까지는 거의 매일 뛰었다, 건강을 위해 뛰기도 했지만, 스트레스 푸는 데는 달리기가 최고였다. 저는 뛰면서 정말 많이 울었다. 그렇게 울면서 뛰고 나면 가족들에게도 말 못할 스트레스가 씻겨 나갔다. 어려움도 많았지만, 작업 하나에만 몰두한 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것 같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