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한번도 나라 원망 안하셨다"…외면당한 영웅, 이제 제복 받는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25일 국가보훈부 주관으로 장충체육관에서 열리는 ‘6·25전쟁 제73주년 행사’에선 참전용사 250여 명이 ‘제복’을 입고 참석한다. 국민으로부터 존경 받고 예우를 받는 보훈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지난해 6월 호국보훈의 달에 시작된 '제복의 영웅들' 프로젝트가 결실을 맺는 자리다.

국가보훈부가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6·25참전유공자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드리고자 새롭게 제작한 제복을 생존 6·25참전유공자에게 21일부터 전달한다고 밝혔다. 사진은 새로운 제복을 입은 '제복의 영웅들' 6·25참전유공자 화보 모습. 국가보훈부

국가보훈부가 6·25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아 6·25참전유공자의 희생과 헌신에 감사드리고자 새롭게 제작한 제복을 생존 6·25참전유공자에게 21일부터 전달한다고 밝혔다. 사진은 새로운 제복을 입은 '제복의 영웅들' 6·25참전유공자 화보 모습. 국가보훈부

그동안 참전용사들은 정부 공식행사에 제복 대신 허름한 조끼 차림으로 참석해왔다. 보훈부는 이들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생존 참전용사 5만1000여 명 모두를 위해 올해 53억원의 예산을 확보해 제복을 맞췄고, 이를 생존한 참전용사 전원에게 무료로 지급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에 앞선 지난 14일 청와대 영빈관으로 국가유공자 및 보훈가족들을 초청해 오찬을 한 자리에서 직접 새 제복을 친수했다. 당시 윤 대통령은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안전을 위해 희생하시는 분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예우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이 나라의 주인이고 이 나라의 주권자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가유공자 및 보훈가족 초청 오찬.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가유공자 및 보훈가족 초청 오찬'에서 김창석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이사에게 '영웅의 제복'을 입혀준 뒤 인사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국가유공자 및 보훈가족 초청 오찬.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14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국가유공자 및 보훈가족 초청 오찬'에서 김창석 대한민국 6·25참전유공자회 이사에게 '영웅의 제복'을 입혀준 뒤 인사하고 있다. 대통령실사진기자단

이제서야 제대로 된 '영웅'으로 대접받으며 6·25행사에 참여하게 된 참전용사의 후손들은 "이번 행사가 어느 때보다 뜻깊다"고 했다.

6·25 전쟁 당시 공적이 최근에야 확인돼 이번 행사에서 무공훈장을 받게 된 고(故) 사해진 상사의 아들 사윤태씨는 23일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얼마 전 윤석열 대통령이 제복 입은 참전용사를 청와대로 초청했다는 소식을 접했다"며 "자랑스러운 마음이 절로 들어 우리 아버지도 살아계셨다면 그 장면을 보고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말했다.

사 상사는 1951년 10월 강원도 금화군 근동면 양곡동 410고지 전투에서 북한군 진지에 접근해 수류탄을 투척해 적 12명을 사살하고 도치카를 파괴한 전공을 세웠다. 1948년 입대했던 그는 전쟁 중 포로로 잡히기도 하고 왼손가락에 총상을 입는 등 수많은 고비를 넘기고 전쟁 뒤까지 10년간 군에 복무했다. 그러나 그는 국가로부터 공로를 인정을 받지 못한 채로 끝내 생을 마쳤다.

6·25 전쟁 참전용사 고 사해진 상사(왼쪽 두 번째)와 전우들. 사윤태씨 제공

6·25 전쟁 참전용사 고 사해진 상사(왼쪽 두 번째)와 전우들. 사윤태씨 제공

아들 윤태씨는 “2002년 돌아가신 아버지는 전쟁 중 전공을 세웠지만 훈장 대신 받은 증서를 잃어버려 이를 인정받지 못했다고 말씀하셨다”며 “공로를 인정받지 못하고 어렵게 살면서도 살아 생전 한번도 나라를 원망한 적 없으셨던 아버지가 이제라도 공을 인정받고 영광스러운 자리에 함께 서게 돼 가슴이 벅차다"고 했다.

이번 행사에서 무공훈장을 받는 또 다른 참전용사인 고(故) 김종술 병장의 아들 김용균씨도 “별다른 보상을 받지 못하고도 평생 나라를 지켰다는 자긍심으로 살아가셨던 아버지가 지금까지 살아계셨다면 이 자리에서 분명 평펑 눈물을 흘리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병장은 1952년 10월 강원 금화군 양지말 북방 무명고지 전투에서 최선두에서 수류탄으로 적 3명을 사살하는 등 아군 작전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의 아들 용균씨는 중앙일보에 “평생 힘들게 사셨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함께 나라를 지킨 전우들을 떠올리며 ‘돌아오지 못하는 전우들 곁에서 이 나라를 끝까지 지켜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며 “국가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금이라도 이렇게 예우를 해준 데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제복의 영웅들'이란 주제의 프로젝트로 제작한 6·25 참전용사 여름단체복이 지난해 6월 공개됐다. 사진은 새 여름단체복을 착용하고 화보를 촬영한 6·25 참전용사들. 국가보훈부

'제복의 영웅들'이란 주제의 프로젝트로 제작한 6·25 참전용사 여름단체복이 지난해 6월 공개됐다. 사진은 새 여름단체복을 착용하고 화보를 촬영한 6·25 참전용사들. 국가보훈부

이번 6·25 행사는 전후 70년간 예우해주지 못했던 이들 영웅들에게 초점을 맞춰 기획됐다.

본행사에선 박정래 시인이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소개한다. 박 시인은 6·25 전쟁의 참전 영웅 고(故) 박순홍 하사의 아들이다. 박 하사는 참전 기간 중 274일간에 걸쳐 8만여 자로 기록한 『진중일기』를 남겼고, 이는 지난해 출간됐다. 박 하사가 남긴 기록 원본은 현재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진중일기엔 불과 몇 시간 전까지 함께 적과 맞서 싸웠던 전우의 전사 소식을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과, 치열한 전투 순간 문득 떠오르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박 시인은 이날 본지와의 통화에서 “살아 돌아오지 못한 전우들과 호국영령들에 대해 감사와 존경을 품고 살자는 아버지 말씀과 후손으로서 이를 되새기는 마음을 편지에 담고 싶었다”고 했다.

고 박순홍 하사가 6·25 전쟁을 기록한 진중일기. 국가보훈부 제공

고 박순홍 하사가 6·25 전쟁을 기록한 진중일기. 국가보훈부 제공

지난 70여년 잊혀졌던 영웅들의 후손들은 한 목소리로 "더 이상의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다음 세대가 참전용사의 희생을 잊어선 안 된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윤태씨는 “전쟁이 얼마나 비극적인지, 그리고 점차 잊혀져가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우리 아버지들의 희생을 통해 기억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 시인은 “참전용사들의 헌신을 매일 되새기는 건 어렵겠지만, 가끔씩이라도 진정성을 가지고 되새기는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며 “‘위대한 헌신에 존경과 감사를’이라는 올해 6·25 행사의 주제가 그래서 더 가슴을 울린다”고 했다.

또 이번 행사에선 2023년 병역 명문가로 선정된 6·25전쟁 참전 유공자 남명식씨와 아들 남덕우씨, 손자 남상혁씨 등 3대가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함께 낭독하는 자리가 마련된다. 기념공연에선 아직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12만 1879명의 6·25전쟁 전사자를 기억하겠다는 의미를 담은 '끝까지 찾아야 할 121879 태극기' 캠페인을 조명한다.

국가보훈처는 참전유공자에 대한 인식 제고를 위해 '제복의 영웅들' 사업을 추진해왔다. 왼쪽은 기존에 제공했던 조끼이고, 오른쪽은 이번 사업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정식 제복. 연합뉴스

국가보훈처는 참전유공자에 대한 인식 제고를 위해 '제복의 영웅들' 사업을 추진해왔다. 왼쪽은 기존에 제공했던 조끼이고, 오른쪽은 이번 사업을 통해 무료로 제공되는 정식 제복. 연합뉴스

제복 전수식에서는 참전유공자 대표로 한영섭·이창건·고흥숙 유공자에게 제복을 입혀드린다. 이들은 각각 종군기자, 유격대원, 여성 의용군으로 활약했다. 박민식 보훈부 장관은 “그분들을 존중하고 예우하는 분위기가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 이를 미래세대가 이어나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