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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스타로 접근해 "여보야"…10억 뜯은 '홍콩사업가' 수법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투자를 유도하는 로맨스 스캐머. 해당 쪽지를 받은 30대 여성은 이 남성의 권유로 지난달 가짜 가상화폐 거래소에 5000만원을 투자했고, 돈을 되찾지 못했다. [독자 제공]

투자를 유도하는 로맨스 스캐머. 해당 쪽지를 받은 30대 여성은 이 남성의 권유로 지난달 가짜 가상화폐 거래소에 5000만원을 투자했고, 돈을 되찾지 못했다. [독자 제공]

“다이빙 사진이 멋지네요! 어디서 찍은 건가요?”

 회사원 A(46)씨는 지난 4월 한 남성에게 인스타그램 DM(개인 쪽지)을 받았다. 번듯한 외모의 이 남성은 자신이 홍콩에 거주하는 사업가라고 소개했다. 그는 A씨가 올린 인스타그램 계정 속 다이빙 사진들에 좋아요를 누르며 관심을 표시했다. 3주 가까이 날마다 안부 인사를 주고받던 이 홍콩 사업가는 자신이 금융 분야 전문가이며, 특별히 A씨에게만 투자 정보를 알려주겠다고 말했다.

한 스캐머의 인스타그램 계정. 스캐머들의 인적사항이나 국가 등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들이 피해자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방식은 비슷했다. [독자제공]

한 스캐머의 인스타그램 계정. 스캐머들의 인적사항이나 국가 등은 조금씩 다르지만 이들이 피해자들에게 말을 걸어오는 방식은 비슷했다. [독자제공]

남성에게 호감이 있었던 A씨는 남성의 말대로 자신의 업비트 계좌에 있던 2200만원을 출금해 남성이 권유한 가상화폐 거래소 '테더 유에스디티(https://tetherusdtex.com/)'에 연동돼 있다는 계좌로 입금했다. 얼마 후 남성은 “거래에서 수익이 났다”며 A씨에게 100달러를 송금해줬고, 이어 “돈을 더 넣으면 짧은 시간에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고 꼬드겼다. A씨는 가지고 있던 1억 3000만원을 가상화폐 계좌에 추가로 송금했고, 남성은 틈만 나면 A씨에게 추가 투자를 권유했다. A씨는 이후로도 1억 2000만원을 더 투자했다.

가짜 가상화폐 거래소인'테더 유에스티디(Tether USDT)'. 로맨스캐머들은 이 거래소 주소를 주면서 피해자들의 입금을 유도했다. 해당 거래소 사이트는 여전히 운영 중이다.

가짜 가상화폐 거래소인'테더 유에스티디(Tether USDT)'. 로맨스캐머들은 이 거래소 주소를 주면서 피해자들의 입금을 유도했다. 해당 거래소 사이트는 여전히 운영 중이다.

얼마 안 가 남성은 A씨에게 “계좌에 있는 돈을 현금화하라”고 부추겼다. 하지만 환전을 시도할 때마다 거래소 측에서는 “22% 소득세를 먼저 내야한다”“환전 수수료를 내야한다”는 등의 이유로 추가 비용을 요구했다. 그렇게 더 뜯긴 돈이 1억5000여만원. 그렇게 하고도 A씨는 문제의 거래소에서 투자금을 한 푼도 돌려받을 수 없었다. 남성은 이후 연락이 두절됐다.

뒤늦게 사이트 자체가 사기 사이트라는 걸 알게 됐다. 4억원 넘는 돈을 뜯긴 A씨는 “남성을 믿었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았다”며 “개인 사채를 써서 이자 걱정에 잠도 자지 못하는 지경”이라고 털어놓았다. 23일 경찰에 따르면 서울 중랑경찰서는 가상화폐 거래소 직원인 척 A씨의 돈을 빼돌린 계좌주 6명을 사기 혐의로 추적중이다.

 부산 강서경찰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돈을 뜯긴 B(46)씨가 진정한 사기 사건을 수사 중이다. B씨도 지난 4월 인스타그램에서 “홍콩 사업가”라고 주장하는 남성으로부터 쪽지를 받았다. 남성은 B씨에게 “애인이 있느냐”고 물었다. 자신은 코로나 당시 사업이 잘못되면서 이혼을 당했다고 했다. B씨가 싱글이라고 밝히자 “아름답다”며 연인처럼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남성은 신분증 사진까지 보여주며 B씨를 안심시켰고, 둘은 서로를 ‘여보’라고 부를 정도로 가까워졌다. 얼마 안 가 남성은 B씨에게 투자를 권유했고, B씨 역시 A씨와 같은 가상화폐 거래소에 1억여원을 입금했다.

로맨스스캐머 남성이 피해자 B씨에게 보낸 홍콩 시민 신분증. 이 남성은 자신의 경제학 교수로부터 얻은 정보를 나눠준다며 B씨에게 투자를 유도했다. [독자제공]

로맨스스캐머 남성이 피해자 B씨에게 보낸 홍콩 시민 신분증. 이 남성은 자신의 경제학 교수로부터 얻은 정보를 나눠준다며 B씨에게 투자를 유도했다. [독자제공]

 A씨와 B씨 외에도 취재 과정에서 같은 사이트를 활용한 사기 수법에 당한 피해자 7명이 확인됐다. 피해금액은 10억원이 넘었다. 모두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접근해 피해자들의 취미 활동을 소재로 말을 걸어왔다. 대화 중간중간 자리를 비운 뒤 “어디 갔다 왔냐”고 물으면 “잠시 코인 거래를 하고 왔다”고 답하는 식으로 '복선'을 깔기도 했다. 3주가량의 '워밍업'이 끝나면 “돈을 벌게 해주겠다”며 문제의 사이트에 회원가입을 유도한 뒤 소액 투자를 권했다. 단 기간 낸에 소액의 수익금을 돌려주며 안심시킨 뒤 더 큰 금액의 투자를 유도하고, 나중에는 “환전을 하려면 수수료와 세금을 내야 한다”며 추가로 돈을 뜯어내는 과정까지 유사했다.

아직도 활동 중인 스캐머 계정. 주로 싱글 30~40대가 주요 타깃이 된다. [독자 제공]

아직도 활동 중인 스캐머 계정. 주로 싱글 30~40대가 주요 타깃이 된다. [독자 제공]

 로맨스스캠은 보이스피싱과 달리 긴급 계좌지급정지 신청도 불가능해 초기 대응부터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지금도 ‘홍콩 사업가’는 다른 인스타그램 계정에 댓글을 달며 다음 피해자를 물색 중이다. 미국에 있다는 문제의 거래소 사이트 역시 아직 살아있다. 사건을 담당 중인 경찰 관계자는 “기존 로맨스스캠이 ‘비행기표를 보내달라’, ‘환전을 해달라’는 등의 요청을 통해 돈을 빼앗는 방식이었다면, 이번 사기는 코인 투자를 권유하는 신종 로맨스스캠 수법”이라며 피해 금액이 커질 수 있다는 점에서 주의를 당부했다. 일부 피해자들은 “일부 계좌가 중복되고, 피해를 본 가짜 가상화폐 사이트도 같은데 수사가 산발적으로 진행돼 아쉽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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