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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세컷칼럼

코로나 끝나고 누리호 쐈어도 중소 항공기업은 비명

중앙일보

입력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K씨는 항공기 부품 업체 창업자 아들이다.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기업 근무 경험을 가진 뒤 30대 초반이던 2010년에 부친이 운영하는 D사의 공장이 있는 경남 사천시로 갔다. 가업을 잇기 위해서였다. 회사 일을 하나씩 익혔고, 수년 뒤에 공동 대표이사직을 맡으며 경영 실무를 책임졌다.

 그러나 그는 지금 서울에 산다. 청소년 학교 밖 활동을 지원하는 정부 기관에 근무한다. 지난해 관리직에 지원해 채용됐다. K씨는 “회사가 어려워져 내 인건비라도 줄여야 한다는 생각, 나와 가족을 위해 다른 일을 찾는 게 옳다는 생각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배경을 말했다. 회사 운영은 부친이 맡고 있다고 했다.

 K씨 부친이 세운 D사는 국내의 항공기 부품 생산업체 중 비교적 규모가 큰 곳이다. 현재 직원이 약 250명이고, 지난해 매출액이 155억원이다. 금속 성형·가공에 남다른 기술력을 가진 회사다. 그런데도 K씨는 “회사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항공기 부품회사 2세 승계 포기
적자 누적에 회사 매각도 고려

업체 매각, 워크아웃도 잇따라
“제작비 올랐는데 납품가 정체”

단순가공 산업구조 개혁하고
혁신 이끌 ‘우주청’ 서둘러야

“인건비·재료비 상승이 가장 문제”

 K씨에 따르면 경영 악화 경위는 이렇다. “6∼7년 전부터 수익이 나지 않았다. 주 거래처인 한국항공우주산업(KAI)·대한항공과 계약한 납품 부품의 단가에 비해 제조 원가가 많이 들었다. 최저임금 급상승의 여파로 인건비 부담이 크게 늘고 국제 원자잿값이 많이 뛴 게 주로 영향을 미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20년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전 세계적으로 항공기 생산이 급감해 일감이 확 줄었다. 매출은 반 토막 이하로 줄었지만, 인건비를 포함한 운영 경비를 그에 맞춰 줄일 방법은 없었다. 설비 투자를 위해 은행 등에서 빌린 돈의 이자도 꼬박꼬박 내야 했다. 회사에 적자가 계속 쌓일 수밖에 없었다.”

 D사는 은행들이 대출 기한을 연장해 주고 이자도 줄여주는 ‘자율협약’ 대상이 됐다. 더 이상의 대출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절벽에 서 있는 셈이다. 팬데믹 상황이 끝나면서 주요 항공기 생산국에서 민항기 제조가 활발해졌다. 이에 따라 D사의 경영 사정도 좋아지는 것일까. K씨는 “그렇지 않다”고 한다. “인건비와 원자잿값에 비해 턱없이 낮은 납품 단가의 문제가 해소되지 않는 한 경영 상태가 반전될 가능성은 없다”고 말한다. K씨는 부친이 회사의 생산 라인을 대폭 축소하거나 회사 전체를 매각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29개 업체 3년 적자 885억원

 지난달 24일 누리호 3차 발사가 성공적으로 이뤄졌다. 엔진, 로켓 동체, 연료 탱크, 탑재 위성 등이 한국에서 만들어져 ‘한국형 발사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관련 전문가들은 우주항공산업이 앞으로 한국 산업을 이끌 성장 동력 중 하나라며 장밋빛 미래를 말했다. 우주항공청 설립을 서둘러야 한다는 주문도 쏟아졌다. 때마침 팬데믹 상황이 막을 내리며 항공산업의 수요가 대폭 증가했고, 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한국산 군용기에 대한 국제적 관심도 커졌다.

 그런데 한국 항공산업의 기반 역할을 하는 중소기업들은 이구동성으로 현실이 암담하고 장래도 절대 밝지 않다고 한다. 항공 관련 중소기업들은 경남 사천·창원·김해·고성에 몰려 있다. 항공 분야 3대 기업인 KAI·한화에어로스페이스·대한항공의 제조 사업장이 모두 경남에 있기 때문이다. 그중 항공기 제조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KAI가 있는 사천에 50개 안팎의 중소기업이 포진해 있다. 그곳을 둘러봤다.

 “최근에 29개의 이 지역 항공 분야 중소기업 협의체 회원사 중 5개가 매각돼 주인이 바뀌었고, 3개는 기업 회생(워크아웃) 절차를 밟고 있다. 29개 업체의 최근 3년 적자 총액이 885억원으로 집계됐다” 하이즈항공 김광엽 사장의 설명이다. 그는 “누리호 발사로 떠들썩하지만 정작 이곳 회사들은 항공산업 체계 붕괴 조짐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하이즈항공은 누리호의 2단 몸체를 만든 곳이다.

 이 지역의 대표적 항공기 부품 생산업체(누리호의 연료 탱크 제작)인 율곡의 위호철 대표도 “외부에서 짐작하는 것과 이곳의 현실은 크게 다르다. 수도권보다 임금 수준이 낮은 편이고, 교통도 불편해 사천에 와서 일하겠다는 젊은이가 별로 없다”고 걱정했다. 한 업체 임원은 “회사 매각이나 사업 정리를 고민하지 않는 항공 중소업체가 이 지역에 5개도 되지 않는다고 본다”고 말했다.

KAI, “협력업체 경쟁력 강화 필요”

 이들을 포함한 사천 지역 업계 측의 말을 종합하면 상황은 이렇다. 코로나 사태로 보잉과 에어버스의 항공기 생산이 급감하면서 중소기업이 KAI로 납품하는 물량이 확 줄었다. 매출이 급감하니 신용등급이 내려갔다. 여기에 금리 상승이 맞물리면서 대출금 이자율이 올랐다. 8.5%를 감당해야 하는 곳도 있다. 고환율과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금속 원자잿값이 뛰었고 평균 임금과 물가 상승으로 인건비 부담도 커졌다. 공장을 가동하는 데 드는 전기와 가스의 값도 크게 뛰었다.

 여기에 이 지역 항공산업의 특수성이 얹어진다. KAI는 민항기 완제기를 만들지 못한다. 보잉과 에어버스에서 주로 날개와 동체 제조를 수주한다. 거기에 들어가는 부품 생산을 협력업체들이 맡는다. 근원적으로 고부가가치 산업이 되기 어렵다. 다품종 소량 생산이라서 제조 효율성을 높이기도 쉽지 않다. KAI가 납품 단가를 올려주기만을 바라는 구조가 되기에 십상이다.

 이에 대해 KAI 관계자는 “보잉과 에어버스는 꾸준히 납품 단가를 낮춘다. 우리는 그래도 협력업체들에는 단가를 동결하거나 다소 높이는 방식으로 상생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기술 지원 등으로 함께 어려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도 하다. 그들이 무너지면 KAI도 타격을 입는다. 어려운 입장을 모르지 않지만 업체들의 경쟁력 강화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항공 분야 중소기업들은 정부가 추진하는 한국우주항공청 설립을 바라고 있다. 한 업체 임원은 “연구·개발, 직원 교육, 납품 구조, 산업 인프라 등을 책임지는 기관이 생기면 상황이 조금은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고 말했다. 항공산업의 현실을 정확히 진단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데 앞장설 사령탑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한국 항공 중소기업은 지금 절망과 도약의 갈림길에 있다.

글 = 이상언 논설위원 그림 = 안은주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