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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품·폰 안돼” “경영 기밀 공개해라”…높아지는 유럽 ‘녹색장벽’, 왜

중앙일보

입력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로이터=연합뉴스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 로이터=연합뉴스

유럽연합(EU)이 탄소국경조정제도(CBAM)와 신(新)배터리법 등을 제정하면서 ‘녹색장벽’을 높게 두르고 있다. 명분은 ‘친환경 확산’인데, 공급망 이슈 같은 기업 경영 사안부터 제품 세부 스펙(사양)까지 간섭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2일 정보기술(IT) 업계에 따르면, 업계는 지난 14일(현지시간) EU 의회에서 통과된 ‘지속가능한 배터리법’(신배터리법)의 배터리 탈착 조항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도 배터리 수명이 다하면 서비스센터에서 교체가 가능하고, 폐배터리 재활용도 하고 있다”며 “EU가 왜 뜬금없이 탈착식 배터리를 친환경 정책으로 내세우는지 의아하다”고 말했다.

EU 의회가 통과시킨 신배터리법은 ▶배터리 전 주기에 걸쳐 탄소 배출량을 측정하는 ‘탄소 발자국’ 제도 ▶리튬·니켈 등 광물 재사용 ▶휴대용 전자기기의 배터리를 소비자가 직접 탈착‧교제할 수 있게 설계하는 제도 등을 골자로 한다.

과거 대부분의 휴대폰은 탈착식 배터리를 채택했지만, 현재는 ‘배품폰’(배터리 품은 폰)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제품을 더 얇고 확장성 있게 디자인할 수 있고, 방수·방진 기능 적용에 유리해서다. 애플은 2007년 아이폰부터, 삼성전자는 2015년 갤럭시S6 시리즈부터 일체형 제품을 주로 생산하고 있다.

EU의 탈착 배터리 제도 시행 시점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다만 실제 법이 시행된다면 스마트폰 제조사들은 제품 설계부터 생산라인을 대대적으로 바꿔야 해 혼란이 예상된다. 업계 관계자는 “전 세계 스마트폰 제조사가 대부분 일체형 배터리를 채택하고 있어, 실제 법 시행이 되려면 업계 논의와 공청회 절차 등이 먼저 진행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충전단자 C타입 통일”…아이폰 변경 불가피

EU가 스마트폰 스펙에 칼을 들이댄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엔 유럽 내 모든 신규 휴대기기의 충전 단자를 내년 말일까지 USB-C 타입으로 통일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EU는 “충전기 구매 비용을 연 최대 2억5000만 유로(약 3350억원) 절감하고, 1만1000t의 폐기물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며 “전자 폐기물을 줄이고 소비자의 삶을 더 편리하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당장 유탄을 맞은 건 라이트닝 충전 방식을 고집해왔던 애플이다. 전문가들은 애플이 맥북·아이패드에 이어 아이폰까지 조만간 충전단자를 USB-C 타입으로 바꿀 것으로 보고 있다.

아이폰6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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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CBAM 전환기간 시작…韓철강 부담 커져 

EU는 2019년 신성장 전략인 ‘유럽 그린딜’을 제시한 뒤 환경·기후변화 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CBAM이 대표적이다. 온실가스 배출 규제가 느슨한 국가에서 생산된 제품을 EU로 수출하는 경우, 생산 과정에서 발생한 탄소 배출량을 추정해 ‘탄소세’를 부과하는 제도다.

먼저 철강·알루미늄·비료·전기·시멘트·수소제품 등 6개 품목이 대상으로, 오는 10월부터 ‘보고 의무 부과 기간’(전환 기간)이 시작된다. 철강의 경우 한국의 EU 수출액이 적지 않고, 탄소 배출이 많은 고로 공정의 비중도 높아 향후 수출에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한국무역협회는 “CBAM은 한국 기업의 환경 관련 생산비용을 상승시킨다”며 “대상 품목의 실제 온실가스 배출량 측정, CBAM 신고서 제출, 인증서 구매 등 규정 준수 비용을 증가시킬 것으로 예상한다”고 분석했다.

“경영 기밀 공개하라”…제품 스펙에도 칼날 

지난 1월 발효된 ‘지속가능성 공시 지침’(CSRD)도 마찬가지다. 2025년 시행 예정인 ‘공급망 실사 지침’은 EU 내 매출 1억5000만 유로(약 2130억원) 이상인 기업에 인권과 환경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 실사 의무를 부과한다. 기업의 사업장과 공급망 전체에서 발생한 인권 침해, 환경파괴 등을 파악해 개선하고 그 내용을 공개해야 하는데 경영상 기밀이 포함될 수밖에 없어 기업들엔 부담이다.

올해 초엔 삼성전자·LG전자의 프리미엄 TV제품이 유럽 시장에서 판매중단 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지난 3월부터 TV에 적용하는 에너지효율지수(EEI) 기준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올해 신제품부터 스펙을 바꿔 이 기준을 가까스로 충족시켰다. 이밖에 EU의 에코디자인 규정(ESPR), 신화학물질 관리 제도(REACH), 특정 유해 물질 사용 제한 제도(RoHS) 확대 등도 기업들에겐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박경민 기자

박경민 기자

“자국 산업 보호 목적…배출권 거래제 어필해야” 

전문가들은 EU가 친환경과 공급망 안정화 같은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상은 자국 산업 보호를 꾀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김두식 테크앤트레이드연구원 상임대표는 “당초 다자주의를 옹호하던 EU는 미국이 자국주의·보호무역 등을 주도하다 보니 이에 동조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며 “이런 시류 속에서 개별 이슈에 대해 이의 제기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한국 기업에 직접 피해를 주는 부분은 정부가 강하게 문제를 제기하고, 기업들도 경영 전략을 새롭게 짜야 한다”고 말했다.

김성우 김앤장 환경에너지연구소장은 “친환경 분야는 미국·EU 등 각국의 파편화한 정책이 진화하는 게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한국은 각국의 스탠더드를 지켜야 하는 상황”이라며 “한국이 2015년부터 탄소배출권 거래제를 시행하고 있는 만큼, 한국 기업에 대한 차별을 줄일 수 있도록 이점을 어필해 볼 만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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