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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한 은행'에 집 날릴 뻔했다…억울한 사태 막아줄 대비'책'

중앙일보

입력

아파트 재건축 조합원인 40대 남성 A씨는 내집 마련의 꿈을 눈앞에서 놓칠 뻔했다. 몇달 전 중도금 대출을 받지 못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갑자기 큰 사고를 당해 기본적인 의사소통도 어려워졌는데, 법정 대리인인 성년후견인이 대신 은행에 가자 대출이 거절된 것이다. 법원으로부터 허가를 받았다고 설명해도 은행은 막무가내였다. 재건축사업 특성상 조합과 연계된 은행에서만 대출을 받을 수 있어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후견인이 금융감독원에 민원을 넣어 일은 겨우 해결됐다.

성년후견 제도는 장애나 고령 등으로 의사소통이나 거동이 곤란한 사람에게 법원이 성년후견인을 지정하는 제도다. A씨의 경우처럼 재산 획득·처분과 관련한 법률행위를 대리하는 것은 성년후견인의 대표적인 역할이다. 법원에 후견개시 심판을 청구하면, 법원이 건강상태나 재산 상황 등을 고려해 후견인 선임 여부와 대리할 역할의 범위를 결정한다. 가족이나 친구가 될 수도 있고, 변호사나 법무사, 사회복지사 등의 전문가가 선임될 수도 있다.

서울가정법원 후견센터. 임현동 기자

서울가정법원 후견센터. 임현동 기자

“후견이 뭔데”하던 은행에 설명서가 생겼다 

 2013년 7월 성년후견제도가 시행된 지 어느새 10년, 제도를 찾는 사람들은 해마다 늘어 2021년 후견사건 접수 건수는 1만1545건에 이른다(2022 사법연감). 그런데도 A씨 사례처럼 성년후견인들은 기본적인 금융거래를 대리하는 것조차 무지의 벽에 부닥쳤다. 후견인이 ‘법정 대리인’이라는 점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 명확한 사유 없이 일 처리가 거절되는 일이 잦았다. 법원이 내준 ‘후견등기사항증명서’도 무지 앞엔 소용없는 경우가 많았다.

서울가정법원과 금융위원회, 금융감독원, 은행연합회, 사단법인 온율이 머리를 맞댔고 그 결과물인 성년후견인 금융거래 매뉴얼을 지난 5일 발간해 전국 금융기관에 배포했다. 매뉴얼에는 “은행을 찾은 사람이 정말 고객의 성년후견인이 맞는지 어떻게 확인하나요”, “대출이나 부동산 처분과 같은 업무는 어떤 걸 추가로 확인해야 하나요” 등 은행 창구 직원들이 궁금해할 만한 사항들이 꼼꼼하게 담겼다. 거래내용 조회, 예금계좌 개설·해지, 자동이체 신청, 담보대출·신용대출 신청, ATM 사용 등 주요 업무마다 참고사항을 정리해 실었다.

서울가정법원이 금융위원회 등과 펴낸 성년후견 금융거래 매뉴얼. 오효정 기자

서울가정법원이 금융위원회 등과 펴낸 성년후견 금융거래 매뉴얼. 오효정 기자

작은 책자가 나오는 데에도 수많은 협의가 필요했다. 후견인이 법적 대리 권한이 있다고 해도, 은행 입장에선 고객과 직접 거래하지 않는 상황 자체가 위험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후견인이 재산을 빼돌리는 데 은행이 연루될 경우 어떤 법적 책임을 지게 될지 등이 은행의 걱정거리다. 배광열 변호사(사단법인 온율)는 “금융실명제 원칙을 지키는 은행 입장, 실질적인 불편을 겪는 후견인 입장을 모두 만족하게 하는 기본적인 지침이 마련됐다”며 “현장 혼란이 상당히 많이 해소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제도 정착 10년…변화는 '체크카드'부터 

 매뉴얼을 마련하는 과정에 참여한 서울가정법원 후견센터 전현덕 사무관은 2013년 7월 후견제도 탄생부터 관련 업무를 맡아온 베테랑이다. 2002년 가사조사관으로 법원 생활을 시작한 그는 후견을 개시 필요성을 조사하는 업무와 후견인들의 업무 수행 실태를 감독하는 업무를 맡아왔고,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실에서 제도 개선을 위한 기획 업무도 경험했다. 금융업계와 협업할 일이 많은 일이었다. 최근 후견인이 쓸 수 있는 체크카드가 발급될 수 있게 된 것도 오랜 협력과 설득의 결과물이다. 과거에는 후견인이 피후견인의 통장에서 병원비를 내려면 은행 창구에서 신분 확인 절차를 거친 뒤 현금을 찾아와야 했다. 이 카드는 후견 현장에선 ‘혁명’으로 불린다.

서울가정법원 후견센터 전현덕 사무관이 21일 후견센터 상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오효정 기자

서울가정법원 후견센터 전현덕 사무관이 21일 후견센터 상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오효정 기자

 이를 바탕으로 서울가정법원은 다음 목표를 ‘후견인의 비대면 거래’ 도입으로 삼았다. 전 사무관의 개인적 목표기도 하다. 금융결제원과 협력해 후견인 전용 인증서를 발급해 모바일이나 PC로도 기본적 거래가 가능하게 하자는 것이다. 대출처럼 법원 허가가 필요한 중요 거래는 함부로 할 수 없도록 잠금 설정을 하는 방안도 구상 중이다. 전 사무관은 “피후견인 대신 은행 업무를 보려면 창구에 가야만 해 하루를 다 쓴다는 민원이 가장 많다”며 “후견제도를 이용한다고 해서 비대면 거래 서비스를 이용하지 못한다는 것은 차별적”이라고 지적했다.

후견인이 피후견인의 재산을 횡령하지는 않는지 감독하는 것 역시 법원의 역할이다. 서울가정법원 후견센터는 최근 ‘조기감독팀’을 신설해 후견 개시 초기에 후견인이 제출한 피후견인 재산목록에 누락된 건 없는지 꼼꼼히 들여다보고 있다. 이 목록을 추후 후견인이 주기적으로 제출하는 재산목록과 비교해, 새나가는 돈은 없는지 따져보는 것이다. 재산 관계가 복잡한 사건에선 외부 회계사나 세무사 도움도 받는다. 전 사무관은 “첫 단추를 잘 끼워둬야 후견인이 정기적으로 보고하는 재산목록에서 빠진 점은 없는지 더 잘 잡아낼 수 있다”며 “감독이 실질화될 수 있도록 관련 인원을 늘려나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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