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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사마의 노란호박, 이건용 그림…미술관이 된 병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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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25년차 컬렉터’ 홍원표 병원장

 대구에는 매우 열정적인 아트 컬렉터가 다수 있다. 그 중 한 명인 홍원표 원장은 “수집을 시작하며 진료와 수술을 반복하던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고 말했다. 홍 원장의 ‘호박타워’ 1층에 전시된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 호박’. 송봉근 기자

대구에는 매우 열정적인 아트 컬렉터가 다수 있다. 그 중 한 명인 홍원표 원장은 “수집을 시작하며 진료와 수술을 반복하던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고 말했다. 홍 원장의 ‘호박타워’ 1층에 전시된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 호박’. 송봉근 기자

대구시 대봉동 ‘호박타워’ 9·10층에 자리한 탑여성앤탑성형외과에 가본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게 된다. 10층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접수 데스크를 마주한 벽면에 강렬한 대형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작품 옆에 “안젤 오테로, 체이싱 더 티어(Chasing the tear)”라고 쓰여 있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진료 상담실로 가는 복도 벽, 화장실로 가는 벽에도 그림이 줄줄이 걸려 있다. 모두 원화다. 이 정도면 ‘병원’ 콘셉트의 미술관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병원을 이렇게 미술공간으로 가꾼 홍원표 원장(60)은 25년 차 컬렉터다. 요즘 그의 진료실엔 사실주의 회화로 잘 알려진 이광호(56)의 ‘습지’ 연작이 걸려 있다.

자택에도 서도호 설치작품 등 즐비

안젤 오테로의 회화. 송봉근 기자

안젤 오테로의 회화. 송봉근 기자

‘홍원표 컬렉션’은 자택으로도 이어진다. 집 곳곳엔 쿠사마 야요이의 대형 호박 그림과 인피니티 네트(화이트) 회화, 조지 콘도, 알렉스 카츠, 무라카미 다카시와 그의 제자 미스터의 회화, 반투명 천으로 만들어진 서도호의 설치 작품 등 ‘블루칩’ 작가들의 작품이 즐비하다.

그는 국내 생존 작가 중 최고가를 기록한 이우환(86) 화백의 팬이기도 하다. 요즘 자택 거실 중앙엔 다이얼로그(오렌지) 대형 회화를 비롯해 경매시장에서 항상 최고가 기록으로 화제를 모으는 ‘바람’ 연작이 3점이나 걸려 있다. 그에게 미술은 무엇일까. 홍 원장은 “미술품 수집은 내게 즐거운 취미이자 투자 자산, 그리고 인생의 중요한 결실”이라고 말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수집은 어떻게 시작했나.
“25년 전 이사한 후 허전한 벽에 그림을 걸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게 계기가 됐다. 처음엔 갤러리에서 그림을 대여해 걸었는데 그림 한 점으로 집안 분위기가 너무 좋아졌다. 이후 다른 그림을 대여했는데 1~2년 그림을 빌리는 금액이면 한 점을 살 수 있겠더라. 그때 작품을 직접 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첫 구입 작품이 궁금하다.
“큰 사이즈로는 자작나무 숲을 그리는 이수동 작가의 ‘겨울사랑’ 100호가 처음이었다. 지금도 병원에 걸어두고 있다.”
AR 펭크의 회화. 송봉근 기자

AR 펭크의 회화. 송봉근 기자

홍 원장은 인터뷰에서 “미술품 수집은 미적 즐거움 추구와 투자 목적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즐거움만을 위해 수집해서도 안 되고, 재산을 불리기 위한 아트 테크의 수단으로만 여겨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균형을 강조했는데.
“수익을 염두에 두고 사서 빠르게 리세일하는 사람들은 시장이 냉각되면 급히 발을 빼고 나가버린다. 반면에 시장 상황과 상관없이 좋아하는 그림만 구입할 경우 나중에 리세일할 수 없어 그 가치가 제로가 될 수도 있다. 수집을 지속하려면 균형을 맞추는 게 제일 중요하다.”
쿠사마의 ‘노란 호박’ 조각 작품이 1층 로비에 있다.
“모든 작품이 다 소중하지만 각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국내 1세대 행위예술가 이건용의 ‘바디스케이프’ 연작.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국내 1세대 행위예술가 이건용의 ‘바디스케이프’ 연작.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본래 그 호박은 2013년 대구미술관에서 열린 쿠사마 전시 ‘A Dream I Dreamed’의 전시작 중 하나였다. 당시 전시 준비를 위해 대구에 머물던 쿠사마 야요이 스튜디오 대표(이사오 다카쿠라)와 오타 파인 아츠 갤러리 관계자를 우연히 소개받았다. 그는 그들에게 인근 명소를 소개하고, 맛집을 찾아 다양한 한국 음식을 대접했다.

“전시 개막 전날 다카쿠라 대표가 ‘대구에서 멋진 추억을 만들어줘 진심으로 감사하다’며 ‘혹시 원하는 작품이 있으면 말해 보라’고 하더라. 여러 번 고사했는데 그냥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국내 1세대 행위예술가 이건용의 ‘바디스케이프’ 연작.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국내 1세대 행위예술가 이건용의 ‘바디스케이프’ 연작.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홍 원장은 “컬렉터들은 자연스럽게 서로 자신의 컬렉션으로 초대하고 미술 이야기를 공유하는 것을 좋아한다”며 “새로운 정보와 지식을 얻는 과정 역시 즐거움 그 자체”라고 말했다. 이어 “최근 특히 젊은 세대 중엔 월급의 상당 부분을 미술품 구매에 쓰는 사람이 많다”면서 “이들에게 컬렉팅은 자신을 드러내는 도구이자 자기표현의 수단”이라고 설명했다.

“세금 적은 편…투명하게 거래해야”

아직도 미술품 수집을 편법 증여나 탈세 수단이라고 여기는 분도 많다.
“최근 미술품 거래는 갤러리나 옥션 등 중개자를 통한 거래가 대부분이다. 거래 대금도 카드나 통장을 통해 주고받아 투명해지고 있다. 미술품 거래는 각종 세금이 전혀 없다. 양도할 경우 기타 소득으로 분류되기 때문에 세금이 적어 투자 자산으로서 여전히 메리트가 있다.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음성적으로 거래한다면 오히려 나중에 큰 제약이 따른다. 세금이 유리한 만큼 투명하게 거래하는 게 훨씬 낫다.”
존경하는 컬렉터가 있나.
“메라&도널드 루벨 부부를 존경한다. 루벨 부부는 젊은 시절 월급 일부를 떼어 수집을 시작했고, 무명 신인 작가들의 작업실을 직접 찾아가 작품을 샀다. 80세가 넘은 부부가 지금도 잠재력 있는 신인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데 방문한 작가 작업실이 수천 곳이 넘는다고 한다. 부부가 평생 컬렉션을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며 어떻게 부와 명예를 갖게 됐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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