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당한 직배영화 저지(촛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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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민족혼 말살하는 UIP 몰아내고 한국영화 되살리자.』
첫눈이 내린 1일 정오 서울 종로3가 시네마타운 앞에서는 2백여 영화인들의 UIP 직배영화 상영중지 요구시위가 벌어지고 있었다.
저마다 「직배 결사반대」라는 구호가 적힌 검은색 머리띠를 질끈 동여매고 20여개의 피킷과 만장까지 든 영화인들.
이들을 화려한 스크린 대신 차가운 거리로 나서게한 것은 서울시 극장연합회 회장으로 직배 저지에 앞장섰던 이 극장대표 곽정환씨가 직배영화 『사랑과 영혼』의 상영을 결정했기 때문.
『우리 3천여 영화인들은 직배영화 침투이후 줄기찬 투쟁으로 최소한 서울 중심가 개봉관 진출만은 저지하는데 성공해 왔지만 이제는 더이상 내줄 것조차 없습니다.』
이미 오전에 남산동 영화진흥공사에서 규탄대회를 갖고 결사투쟁을 굳게 다짐했던 이들의 표정에는 분노와 허탈감이 교차하고 있었다.
이들이 사전계획대로 곽씨 화형식을 갖기위해 허수아비가 든 검은색 관의 끈을 풀려는 순간 미리 대기하고 있던 전경 1백50여명이 저지를 위해 달려들었다.
격렬한 몸싸움이 시작된 것과 동시에 요란한 구호와 비명이 허공을 갈랐다.
화형식 뒷처리를 위해 영화인들이 준비해온 소화기의 안전핀이 뽑혀 극장 주위는 온통 흰색 연기로 뒤덮였다.
낯익은 스크린의 주역들과 경찰이 벌이는 연기 아닌 실제상황을 호기심 어린 눈길로 지켜보던 1천여명의 시민들.
이들도 최루탄이 터진 것으로 오인,비명을 지르는 해프닝을 연출해야 했다.
『엄청난 자본력을 앞세운 미국영화는 한국영화를 무덤속으로 밀어넣고 우리의 꿈과 정서마저 미국화 시키고야 말것입니다.』
현장에 있던 원로 시나리오작가 최금동씨(74)는 한국영화의 조종을 들으며 소리죽여 흐느끼고 있었다.<이하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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