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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부담' 내세워 3분기 전기료 동결…한전 손실 등 후폭풍 온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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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 서울 종로구의 한 다세대주택 외벽에 전력량계가 부착돼 있다.   연합뉴스

21일 서울 종로구의 한 다세대주택 외벽에 전력량계가 부착돼 있다. 연합뉴스

올해 3분기(7~9월) 전기요금이 동결됐다. 전기료 조정을 '패스'한 건 윤석열 정부 들어 이번이 처음이다. 냉방비 등 국민 부담을 고려했다. 하지만 한국전력 경영 악화·에너지 절약 후퇴 같은 후폭풍이 줄줄이 다가올 전망이다.

21일 한전은 이러한 내용의 3분기 전기요금 산정 내역을 공개했다. 연료비 조정 단가를 기존과 같은 ㎾h당 5원으로 유지하는 한편, 다른 항목도 조정하지 않았다. 전기료 동결은 지난해 1분기 이후 여섯 분기 만이다. 칼자루를 쥔 정부가 지난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찾아온 글로벌 에너지 위기 등으로 꾸준히 올렸던 전기료의 숨 고르기에 나선 것이다. 가스요금도 당분간 인상이 이뤄지지 않을 전망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관계자는 "현재 가스료 조정 관련 계획은 없다"고 말했다.

당정 엇박자 속에 40일 넘게 미뤄졌던 2분기 요금 조정(㎾h당 8원 인상)과 달리 이번 결정은 예견된 상황이었다. 강경성 산업부 2차관은 14일 기자 간담회에서 "3분기는 국민 부담 등을 고려할 때 인상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서 일찌감치 동결에 무게를 실었다. 여기엔 LNG(액화천연가스)·유연탄 등 국제 에너지 가격이 하향 안정세인 게 작용했다. 또한 내년 총선이 다가오면서 '냉방비 폭탄' 등에 대한 정치적 부담 등도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김영희 디자이너

김영희 디자이너

정부가 속도 조절에 나서면서 전기료 현실화는 멀어지게 됐다. 당초 산업부는 올해 필요한 전기료 인상 폭을 ㎾h당 51.6원으로 산정했다. 하지만 1·2분기를 합친 인상분은 21.1원에 그쳤다. 3분기는 이미 동결됐고, 겨울을 앞둔 4분기도 조정 가능성이 높지 않아 목표했던 인상 폭을 채우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선거 이슈가 걸린 여당도 전기료 인상에 적극적이지 않다.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는 이날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 주최 토론회에서 "아직 예측 수준이긴 하지만 (올해) 후반기에는 전기·가스요금이 버틸 수 있을 것 같다"면서 추가 인상이 없을 것임을 시사했다.

재무 상태 악화 속에 수장까지 사임한 한전의 적자 해소는 그만큼 더 늦어질 전망이다. 한전은 2021년부터 올해 1분기까지 45조원 가까운 영업손실이 쌓였다. 8분기 연속 '마이너스'(-) 행진이다. 신한투자증권은 지난 16일 보고서를 통해 한전이 2분기 1조1000억원의 영업손실을 낼 것으로 전망했다. 전력통계월보에 따르면 4월 한전의 전력 판매 단가는 구입 단가보다 7.8원 낮았는데, 1월(17.2원)보다 줄었다지만 여전히 손해를 보면서 전력을 팔고 있는 셈이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창의융합대학장은 "국제 에너지 가격이 지난해보다 낮아졌다지만 전 세계적 폭염, 원유 감산 같은 변수가 많아 하반기 전망은 아직 불안하다. 유럽·일본 등은 여전히 허리띠를 졸라매고 한전도 전력을 팔면 팔수록 적자인데, 정부가 앞장서서 에너지 가격이 안정화됐다고 말하고 요금을 동결한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서울 한 건물에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 연합뉴스

서울 한 건물에 설치된 에어컨 실외기. 연합뉴스

한전은 지난달 25조7000억원 규모의 자구책을 내놨지만, 경영 개선의 핵심인 요금 인상이 없다면 천문학적 손실을 메우기엔 역부족이다. 그러면 고사 위기에 빠진 6500여개 한전 협력업체 등 전력 생태계의 회복도 쉽지 않다. 송·변전망 투자나 채권 시장 등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한전의 제10차 장기 송변전설비계획에 따르면 올해만 3조7000억원 가까운 송변전 설비 투자비가 필요하다. 하지만 재정 문제로 제때 집행되기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 이미 한전 자구책에도 전력 설비 건설 시기 이연, 규모 조정 등이 담겼다.

금융투자협회·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올해 한전채 신규 발행액은 11조1500억원이다(20일 기준). 한전은 이번 달에도 자금 마련을 위해 연 4% 안팎의 금리로 8000억원 어치의 채권을 찍어냈다. 신용등급 AAA급 한전채 발행이 계속 늘어나면 자금 시장 전반에 구축 효과가 찾아올 수 있다. 또한 1분기 기준 한전이 부담한 하루 평균 이자 비용만 약 70억원에 달하는 만큼 한전의 재정적 부담도 커질 수밖에 없다.

'요금 시그널'이 작동하지 않으면서 에너지 절약 정책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3분기 요금 동결로 냉방비 부담 등이 줄면서 전기 소비를 더 해도 된다는 국민 인식이 커질 수 있어서다. 올여름 폭염 예고와 요금 인상 기조 속에 주택용 에너지캐시백 참여 가구가 20만 세대를 훌쩍 넘겼지만, 이런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강천구 인하대 에너지자원공학과 초빙교수는 "요금 동결로 어렵게 추진 중인 에너지 효율화가 잘 안 될 것으로 보인다"면서 "올여름 빨리 시작된 무더위가 9월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큰 만큼 전력 수요도 예상보다 많이 늘어날 우려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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