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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경지인데, 10명중 9명 '골든타임' 놓친다…대피 못하는 대피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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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2015년 8월, 북한이 경기 연천에 있는 우리 군의 대북 확성기를 향해 포격했다. 휴전선 인근인 경기 연천 왕징면은 실탄이 떨어졌다는 신고가 들어올 만큼 긴장감이 역력했다. 불안한 주민들은 대피소로 향했지만, 상당수는 발길을 돌려야 했다. 왕징면 무등리에서 만난 최모(73)씨는 “당시 면사무소 안내에 따라 대피소에 갔지만 자리가 꽉 차서 못 들어간 사람도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다”고 말했다.

접경지역인 경기 연천 왕징면에는 1016명이 살고 있지만, 왕진면 대피소는 주민 141명만 수용 가능하다. 이찬규 기자

접경지역인 경기 연천 왕징면에는 1016명이 살고 있지만, 왕진면 대피소는 주민 141명만 수용 가능하다. 이찬규 기자

지난달 31일 서울시의 경계경보 오발령 사태 이후 민방위 대피소에 대한 관심이 커지며, 대피소 현황이나 관리에 대한 문제 제기도 잇따랐다. 그러나 오발령 책임을 두고 정부와 지자체가 갈등을 빚는 사이, 정작 대피소 자체에 대한 논의는 뒷전이 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 국립방재연구소장인 조원철 연세대 건설환경공학과 명예교수는 “매번 그렇듯 대피소 문제는 점검하지 않고 잘잘못만 따지다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우려된다”고 말했다.

신재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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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전 ‘실제 상황’을 겪은 왕징면에는 지난달 기준 1016명이 살고 있지만, 대피소는 무등리에 있는 한 곳이 전부다. 이곳은 141명만 수용할 수 있다. 875명은 다른 대피소를 찾아야 한다. 가까운 대피소는 4.1㎞ 떨어진 군남면 삼거1리 대피소로, 차로 6분이 걸린다. 행정안전부의 ‘2022 민방위 업무 지침’에 따르면 신속한 대피를 위해서는 도보 5분 거리인 667m 안에 대피소를 설치ㆍ지정해야 한다. 접경지역임에도 ‘골든 타임’ 내 근처 대피소에 몸을 맡길 수 있는 주민은 10명 중 1명 정도에 불과한 것이다. 군남면 대피소 역시 수용 인원은 170명으로, 주민 3039명이 대피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규모다. 2015년 이후 연천군에는 정부지원 민방위 대피소 2곳이 신설됐고, 2곳을 추가로 짓고 있지만 전체 읍면 10곳 중 6곳이 여전히 주민 전부를 수용하지 못한다.

전국 읍면동 40%, 대피소에 주민 다 수용 못해

신재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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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안전재난포털과 주민등록인구통계를 통해 분석한 결과, 지난달 기준 전국 읍면동 3523곳 중 대피소에 주민들을 100% 수용할 수 없는 곳이 1420곳(40.3%)에 달했다. 연천군 같은 접경지역에서도 190곳 중 63곳(33.2%)이 수용률 100% 미만으로, 전체 주민 수용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신재민 기자

신재민 기자

오발령 사태가 발생한 서울시도 마찬가지다. 서울시는 홈페이지를 통해 “1인당 소요 전용 면적 0.825㎡를 기준으로 환산할 경우 (대피시설) 면적 확보율은 367.3%로 모든 서울시민이 대피하기 충분한 상태”라고 밝혔지만, 행정동별로 살펴보면 상황이 다르다. 수용률이 100% 미만인 곳이 45곳(10.6%)에 달한다. 2만801명이 거주하는 광진구 중곡2동에는 대피소 4곳이 있지만, 수용 가능 인원은 3046명에 불과해 서울에서 수용률(14.6%)이 가장 낮았고 삼양동(29.7%), 상계8동(33.2%), 독산2동(37%) 역시 주민들이 곧장 대피할 수 있을 만한 공간이 동 내에 없었다. 또한 현행 행안부 지침에 따르면 1명당 필요한 대피소 면적은 1.43㎡로, 이를 기준 삼으면 서울 전체의 대피소 확보율은 더 떨어진다.

4960명 수용 가능한 대피소인 청파동주민센터 주차장은 지난 6일 만차상태라 이중주차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찬규 기자

4960명 수용 가능한 대피소인 청파동주민센터 주차장은 지난 6일 만차상태라 이중주차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찬규 기자

대피소 대부분이 주거ㆍ상업시설의 지하 주차장 등이라 실제 수용률은 훨씬 낮다는 분석도 나온다. 전국 1만7703개 대피소 중 대피소로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진 정부지원 대피소는 242곳뿐이다. 지난 12일 서울 용산구 청파동의 대피소로 지정된 지하 주차장 3곳을 확인한 결과 한 곳은 만차 상태라 이중 주차를 한 곳이 많았고, 다른 두 곳도 전체 공간의 반 정도에 차량이 주차돼 있었다. 차량이 있는 공간만큼 대피 공간은 줄어들지만, 수용인원 계산에는 반영되지 않는다.

이동 시간을 고려하지 않아 효과가 떨어지는 곳도 많다. 서대문구 충현동의 경우 수용률은 120%지만 7개 대피소 모두 주거지역과 떨어진 외곽에 있다. 실제 충현동 주민 이송연(59)씨와 함께 가장 가까운 거리(548m)의 대피소까지 이동해 본 결과, 총 9분이 걸렸다. 이씨는 “노인이나 다리가 불편한 사람도 동네에 많이 산다. 내리막길도 가파르고 굽이진 길도 많아 9분보다 더 긴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대피소도 핵 공격에 무방비…“현황도 정확히 몰라”

서울 관악구 난곡동의 한 지하주차장 대피소는 경사진 언덕 중간에 지어진 탓에 사실상 지상 주차장과 다름없고, 핵이나 화학공격에 무방비였다. 이찬규 기자

서울 관악구 난곡동의 한 지하주차장 대피소는 경사진 언덕 중간에 지어진 탓에 사실상 지상 주차장과 다름없고, 핵이나 화학공격에 무방비였다. 이찬규 기자

기존 대피소들이 갈수록 커지고 있는 북한의 핵 공격 위협에는 무방비라는 지적도 이어진다. 서울 관악구 난곡동의 한 지하주차장은 동내에서 가장 많은 주민(1만414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피소다. 하지만 경사진 언덕 중간에 지어진 탓에 사실상 지상 주차장과 다름없다. 주차장 곳곳에 창문이 설치돼 있었고, 외부의 폭발이나 오염된 공기를 차단할 수 있는 시설도 없었다.

접경지역의 정부지원 대피소 역시 핵 공격에 대한 대비는 부족했다. 두께 50㎝ 이상 벽과 방폭문 등은 설치됐지만 포격과 그에 따른 폭압만 막을 수 있다. 접경지역의 한 민방위 관계자는 “대부분 대피소가 포격에 대비해 설계됐다. 핵 공격까지 막을 수 있는 방폭문은 국내에 드문 거로 안다”고 말했다. 정부 역시 핵 공격에 대응할 수 있는 대피소 현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행안부 관계자는 “2007년쯤 방호등급제가 폐지됐다. 핵 공격 방어가 가능한 대피소 현황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대피소 90% 지하 주차장…정확한 수용 인원 명시해야”

전문가들은 정확한 수용인원 및 대피 시간 계산, 핵 공격 대비 강화 등을 통해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영주 서울시립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대피 시간이 길수록 위태로운 상황에 맞닥뜨릴 확률이 급격히 높아진다”며 “기존 대피소 관리를 철저히 하면서 이동 취약계층을 위한 구조 방안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 명예교수는 “전쟁 발생 시 국민 생명 보호를 위한 모든 책임은 정부에 있다”며 “지금부터라도 핵 공격 방어가 가능한 시설을 곳곳에 설치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에 대해 행안부 관계자는 “지난주 대피소 운영 실태를 점검해 각 지자체에 개선할 것을 통보했다. 면적을 통해 수용인원을 계산하는 방식을 수정해 현실성 있는 수용인원을 구하겠다. 또한 내년도 용역을 통해 새로운 대피소 설치, 기존 시설 강화 등 핵 공격 방어 관련 방안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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